김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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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시절 김경일

김경일(1980년 8월 30일~현재)은 대한민국 국적의 미드필더로, 한 때 '축구천재'로 당대의 화제가 되었던 선수다.

동명이인으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김경일이 있다.




프로필[편집]

  • 이름 : 김경일
  • K리그 등록명 : 김경일
  • 출생일 : 1980년 8월 30일
  • 신체 : 179cm / 67kg
  • 국가대표 경력
1996년 AFC U-16 챔피언십 본선 대표
1999년 FIFA U-20 월드컵 본선 대표 및 주장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 등번호 : -
  • 리그 기록
소속팀 리그 연도 출장 교체 득점 도움 경고 퇴장
전남 드래곤즈 전남 드래곤즈 K리그 1999 3 2 0 0 0 0
2000 8 7 0 0 1 0
전남 드래곤즈 전남 드래곤즈 2001 12 11 0 0 1 0
2002 0 0 0 0 0 0
2003 0 0 0 0 0 0
대구 FC 대구 FC 2004 6 6 0 1 1 0
2005 0 0 0 0 0 0
Teamlogo seosan.png 서산 시민구단 KNL 2005 1 1 0 0 0 0
통산 K리그 - 29 26 0 1 3 0
KNL - 1 1 0 0 0 0


유소년 시절[편집]

장흥중, 광양제철고등학교를 나온 선수로 광양제철고 축구부 창단 멤버이다. 당시 광양제철고 초대 감독이었던 기영옥 씨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광양제철고에 입학하였으며, 이후 광양제철고가 창단 2년 만에 97, 98 2년 연속 전국대회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당시 고교축구 인사들은 광양제철고 전력의 8할이 김경일 선수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을 정도.. 기영옥 감독은 지금은 기성용 선수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90년대 금호고등학교 감독 재임 시절, 윤정환, 고종수 등 천재 미드필더를 길러낸 장본인으로 고교축구계의 마이다스 손으로 통했던바 기영옥 감독의 3번째 작품은 김경일 선수가 될 것이라 기대를 받은바 있다. 기영옥 감독 스스로도


고3 시절 김경일 선수의 실력은 같은 나이때의 윤정환, 고종수를 뛰어넘었다.


고 회고할 만큼 김경일의 천재성은 대단했다. 이처럼 초고교급 유망주이자 한국 축구의 기대주로 통했던 김경일은 1999년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하였다. 1998년 K리그 신인선수상 수상자인 이동국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할 당시 계약 조건과 거의 동등한 대우를 해줬을 정도로 전남의 기대는 컸다. 이러한 기대를 등에 업은 김선수는 1999년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선발, 1998년 아시아 청소년선수권 주전 미드필더였던 정용훈을 밀어내고 1999년 나이지리아 FIFA U-20 월드컵 본선에 참가, 여기에 대표팀 주장에 선임되기에 이른다.


청소년대표 시절[편집]

하루 아침에 청소년대표 에이스이자 주장으로 등극한 김선수의 비상 배경에는, 당시 대한민국 U-20 감독이 98 아시아청소년선수권 우승을 일궈낸 박창선 씨에서 조영증 씨로 전격 교체되면서 조감독이 구상한 4-3-3 플랫의 구심점으로 김경일이 점찍힌 덕이 컸다. 당시 한국 언론은 '이번에는 반드시 4강 신화 재현!' 을 외치기 시작했고, 특히 혜성처럼 등장해 조영증 감독의 신임을 받으며 주장 자리까지 맡게된 김경일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특히 KBS에서는 특집 방송으로 김경일의 광양제철고 시절 활약을 자세히 소개하며 윤정환의 패스와 서정원의 활동량을 가진 천재 미드필더 등 엄청난 찬사를 하였고, 따라서 전국민적 관심이 김경일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본선 3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한 김선수는 기대 이하의 플레이를 보이며 실망을 안겼다.

조영증은 김경일에게 96 애틀란타 올림픽에서의 윤정환과 같은 플레이메이커의 경기 조율과 창조적인 공간 창출을 바랐던것 같지만. 김선수는 상대팀이었던 포르투갈, 우루과이 선수들의 압박과 몸싸움에 맥없이 무너지며 장기인 전진 패스 능력을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 종국에는 한국 수비수들이 중원의 김경일 선수를 무시하고 공격진에 롱패스를 시도하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빌드업에 문제가 생겼고, 청대는 전술적으로 자멸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조영증의 선발진 구성 미스와 당시로서는 생소한 전술이었던 4-3-3을 3-5-2에 익숙해있던 선수들에게 억지로 밀어붙인 실책도 작용했다. 마지막 말리전에서 4:2로 승리하며 체면치레는 했지만, 라이벌인 일본이 동대회 준우승을 차지했기에 충격이 더했다.[1] 결국 99 청대의 참담한 실패에 대한 비난은 조영증 감독, 그리고 주장 김경일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지고 말았다.


전남 시절[편집]

하지만 조영증은 김경일에 대해 '이제 국제경험도 쌓았으니 더욱 성장할 것이다.'라고 따로 언급하였고, 여전히 그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1999년 K리그가 개막하기 전부터 올해의 K리그 신인왕은 김경일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흘러나올 정도로 김경일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컸던 것. 그러나 리그 3경기 출장 만에 새끼발가락 피로골절 판정을 받으며 최소 6개월의 재활이 필요한 상황이 찾아왔다. 사실상 시즌 아웃. 하지만 김선수는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활 3개월만에 조급하게 복귀하려다 재차 시즌 아웃을 당했고, 결국 99시즌은 물론 2000시즌 전반기까지 단 한 경기도 나오지 못하는 시련을 겪었다.

그렇게 2년이 흘러 2001년 안양 LG 치타스와의 경기에서 오랜만에 투입되며 기대를 모았지만 역시 교체 출장 몇차례 만에 무릎 연골 파열 진단을 받는다. 전남의 배려로 독일에서 수술을 받고 재활을 이어갔으나, 부상 부위가 악화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수술을 받았다. 결국 2003년까지 단 한 차례도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재활을 하고 회복 훈련을 할라치면 부상 부위가 계속해서 악화되었다고. 결국 5년 동안 김경일에 대한 기대의 끈을 놓지 않았던 전남 드래곤즈도 그를 포기, 결국 전남에서 퇴단하고 만다.


대구 시절과 은퇴[편집]

지도자로 활동 중인 김경일

전남에서 나온 김선수는 2004년 대구 FC에 입단하였다. 당시 대구의 감독이었던 박종환은 김선수를 어떻게 몸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가 있느냐며 안타까워 했다고.. 어떻게든 그 재능을 살려보려 대구에서도 노력해봤지만, 결국 2005년 6월, 선수 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의사의 선고와 함께 은퇴하게 되었다. 당시 진단으로 무릎이 자꾸 탈골된 이유가 알려졌는데, 선천적으로 무릎뼈의 바깥부분이 함몰돼 있는 기형적인 신체구조를 갖고있어 축구선수를 뛰기 불가능한 상황 이었다고 한다. 재능은 부여받았지만, 몸상태는 이를 따라가지 못한 비운의 선수의 전형이라 할만할듯.

결국 그렇게 비운의 선수 생활을 정리한 김선수는, 은퇴 이후 '김경일축구교실' 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2017년 현재는 천안축구센터 U-15팀 감독으로 활동 중에 있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 공격 일변도였던 전술 성향과 에이스 몰아주기가 일상이었던 당대 한국 학원축구 스타일에 최적화된 플레이어였다는 평. 그러나 상대팀 에이스를 터프하게 제압하는법을 알고 있었던 당대 K리그 무대에서는 김선수와 같은 스타일이 살아남기 어려웠고 더군다나 몸상태도 성치 않았다. 이래저래 운이 없었던 선수..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참고[편집]

  1. 특히 일본은 직전 연도인 98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에서 한국 청소년대표팀이 이긴 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