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간

풋케위키, 대한민국 대표 축구위키 FootballK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김성간 (1912년 11월 17일 ~ 1984년 5월 29일)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이자 축구인이다.


선수 시절[편집]

평안남도 평원군 이화리[1] 출신으로 광성중학, 숭실중학, 연희전문을 나왔다.[2] 연희전문 재학 시절 연희를 대표하는 센터 포워드로 대활약하였으며, 동시에 평양 축구단 소속으로도 활동하였다. 1935년에는 연희전문이 주도한 상해 원정 참가하였으며, 조선축구대표팀 소속으로 전일본축구선수권에도 참가하는 등 한중일을 오가며 해외 경기 경험을 쌓았고, 1939년에는 함흥 축구단 소속으로 일본 축구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일만화교환경기대회를 소화하기도 하였다. 이후 태평양 전쟁 등으로 각종 스포츠 활동이 중단되면서 김성간 씨도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말았다.


지도자 시절[편집]

선수 생활 정리 후, 개성 송도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김씨는 6.25 동란을 겪으면서 서울에 터전을 잡게되었으며 1952년 김화집김덕준배종호 씨 등과 함께 국제 심판에 지명되어 10여년 간 심판으로 활약하였다. 동시에 1954년 아시안게임 코치ㆍ1956년 AFC 아시안컵 코치로 나서 아시안게임 은메달, 아시안컵 우승을 이끌어내는 등 지도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이후로는 1960년대 중반까지 대한축구협회 이사, 부회장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다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3]


은퇴 이후[편집]

미국으로 이민 후, 1984년 5월 29일 빗길 교통사고로 숨을 거두었다. 향년 72세.


플레이 스타일[편집]

  • 슈팅의 세기와 정확도가 매우 뛰어나 센터 포워드 포지션에서 골게터로 활약했다. 초대 대표팀이라 할 수있는 조선축구협회대표팀에서도 부동의 센터 포워드로 활동했을 정도.


에피소드[편집]

  • 숭실중학부터 연희전문 시절에 이르기까지, 십년 가까운 세월동안 보성전문 김용식 씨의 맞수로 통했다. 두 선수는 라이벌 매치 때마다 승부욕을 불태우며 명승부를 만들어냈으며, 경기 외적으로도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 김성간 씨의 집안은 스포츠 가족으로 유명하였다. 부인인 김연경 씨는 이화여전 시절 탁구 선수로 활동하였고, 장남인 김영일 씨는 60년대 한국농구를 대표하는 센터 출신이었고 며느리인 장영희 씨는 전국체전 단거리 3관왕을 차지하기도 한 육상 선수 출신이었기 때문.
  • 1960년대 중반부터 축구협회 행정직 일선에서도 물러난 뒤에는, 정릉동 자택에 '김 스포츠 용구 제작소'를 만들고 축구공 제작을 하셨다고 한다. 당시 대한축구협회에서는 김성간 씨가 제작한 축구공을 제10회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는 물론, 박스컵 등 국내에서 개최된 국제 대회에 공인구로 사용하였다는 후문.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1. 출처 월간축구 1973년 3월호. 여기에는 평원군 영유읍으로 나오는데, 1914년 부군면통폐합으로 영유군, 숙천군, 순안군이 합쳐져서 평원군이 만들어졌던 탓에 기존 영유군 출신들은 읍내를 영유읍이라 불렀다. 하지만 정식 행정 구역명은 평원군 이화리가 맞다.
  2. 정확히는 숭실중학 졸업 후, 근로장학생 신분으로 숭실전문 농과에 입학했으나 1년만에 자퇴하였고 귀향해서 소일하다 일본 유학을 선택, 일본 중앙대학 법학과에도 1년을 다녔으나, 역시 중도 자퇴한 뒤 현정주 씨의 제의를 받아 연희전문 축구부에 입단하였으며 연희전문 졸업장을 받았다.
  3. 여기에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 것이, 원래는 미국에 이전부터 이민을 가 살고있던 맏딸을 만나러 잠시 미국에 간 것이었으나, 김씨가 미국에 머무는 사이 큰아들인 김영일 씨가 열차 사고로 34살의 나이로 요절하는 사건이 발생, 그 충격으로 아예 미국 이민을 결심하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