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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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중석(大韓重石, Korea Tungsten)은 과거 대한민국의 텅스텐[1] 채굴 국영기업이었다. 1956년 창단하여 1972년 해체한 축구단은 박태준 사장 재임 시절 국내 최강팀의 면모를 보인 실업축구단이었다. 대한중석은 텅스텐 채굴이 사양산업이 되자 광산을 폐쇄하고 초경사업부분은 1994년 민영화되어 거평그룹에 인수 되었다가 다시 대구텍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한중석[편집]

대한중석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 4월 강원도 영월의 상동에서 텅스텐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1923년 일본인이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1936년 텅스텐 광산개발을 위해 일제에 의해 소림광업(小林鑛業)이 설립되어 상동 및 달성광산이 개발되었다. 해방 후 귀속재산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인수되었다. 전세계 매장량의 8%를 점하는 최대의 단일 중석광구이던 상동광산과 달성광산을 기반으로 냉전시기 제1세계의 공급량의 최대 20%까지 차지하며, 한국정부의 달러 공급원이 되었다. 그러나 1952년 6월 중석불사건[2]으로 인해 그해 9월 대한중석광업㈜이 설립되었다. 이승만 정권 말기에는 한때 대한민국 전체 수출액의 약 60%까지 차지했던 거대 국영기업으로 성장하였지만 방만한 경영으로 만성적자를 시달렸다. 중석수출은 이렇다할 산업이 없는 한국에 있어 최대 달러공급원이었으므로 쿠데타 성공이후 집권한 박정희는 신뢰하던 박태준(당시 육군소장)을 예편시켜 1964년 대한중석 사장에 임명하였다.[3] 그리고 기대에 발맞춰 박태준은 부임 1년만에 회사를 흑자로 만들었다. 196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와의 합작투자(정부 75%, 대한중석 25%)로 포항제철(현 포스코)이 설립되었으며, 박태준은 포항제철 사장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1975년에는 달성광산이 바닥을 드러네 폐광되면서, 서울에 있던 본사가 1999년 그 자리(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로 옮겨가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80년대 이후 텅스텐 세계 최대 매장국인 중국이 시장개방정책으로 세계 텅스텐 시장에 뛰어들게 되면서 사양산업이 되어 1994년, 상동광산이 폐쇄되고 건설부분과 초경사업부분[4]은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정책으로 인해 거평그룹으로 인수되었다. 이후 외환위기로 인해 거평그룹이 부도처리되고 대한중석 초경사업부분은 IMC그룹에 인수되어 사명을 대구텍(TaeguTec)으로 변경한다. 2006년, 세계적인 투자가인 워렌 버핏의 회사 버크셔 해서웨이가 대구텍의 모기업 IMC그룹의 지분 80%을 인수하면서 대구텍의 주인이 되었으며, 2009년 주식회사에서 유한회사로 전환되었다.


대한중석 축구단[편집]

대한중석 축구단은 1956년 창단된 실업축구팀으로 1964년 사장으로 부임한 박태준의 대대적인 개편을 통해 국내 최강팀의 면모를 보이다 1972년 경영합리화를 빌미로 해체되었다.


역사[편집]

태동 및 발전[편집]

아시아클럽챔피언십 말레이시아 원정을 앞두고 기념 촬영한 대한중석팀
ⓒ월간축구 1972년 3월호

1952년부터 대한중석 창립시부터 이미 회사 내에 축구단이 존재했으나 직장동호회 수준이었다고 하며, 1956년 김영근 씨를 영월로 모셔와 실업 축구단을 창단된 이후에도 영월 상동광산 주변의 환경이 열악하여 제대로 된 운동장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훈련을 하고 훈련 외 근무시간에는 광부들과 함께 채굴 작업에 선수들이 참가하는 열악한 수준을 면치못했다고 한다.[5] 그러다 축구에 관심이 많던 박태준이 1964년 대한중석에 부임한 후 회사가 흑자전환 되는 등 안정화되자 이전부터 구상해뒀던 축구팀을 개편ㆍ정비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팀으로 만들었다. 먼저 대한중석 축구단 초창기부터 줄곧 팀을 위해 일해온 한홍기 씨를 코치로 선임해 힘을 실어주고, 국가대표 선수였던 함흥철, 김정석, 조윤옥, 석효길, 황종현, 최재모, 김창일, 박수일, 최상철 등 내로라하는 스타급 플레이어들을 영입, 국내 최고급 대우와 체계적인 훈련 스케쥴을 보장해 창단하자마자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강팀으로 발돋움했다. 이후 1965년과 1966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를 연거푸 우승했고, 1967년에는 초대 아시아클럽챔피언십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셀랑고르 FA와 서울/말레이시아 2연전을 치르기도 하는등[6] 국제 무대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쇠퇴 및 해체[편집]

1966년 런던 월드컵에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이 8강에 오르는 대파란을 일으키자, 1967년 2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의 지시로 창설한 양지 축구단에 대한중석 핵심 전력을 차출당하면서 전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여기에 금융단 축구팀들의 잇따른 창단으로 인해 선수들이 유출되고, 축구단의 후원자이던 박태준이 1968년 포항제철 사장으로 전임하였으며, 팀의 수장이었던 한홍기 감독은 1970년 청룡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옮겨감에 따라 대한중석 축구단의 존립 기반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1972년 경영상 흑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영합리화라는 명목으로 주 2일만 축구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근무를 하라는 회사의 방침에 선수들이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하면서 축구단은 해체되고 말았다. 해체 1년후인 1973년, 포항제철소 1기가 준공되자마자 박태준포항제철 축구단를 창단함에 따라 대한중석 축구단의 잔류 멤버와 스탭진, 양지 축구단이 해산되면서 예편한 이회택 등 신진 멤버가 합류해 포항제철 축구단을 구성했다. 감독부터 코치, 선수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멤버구성이 대한중석 축구단과 상동해, 대한중석 축구단을 포항 스틸러스의 전신으로 보기도 한다.


홈구장[편집]

강원도 영월에 있을 당시에는 축구장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논두렁에서 훈련하는 안습한 시절도 있었으나, 박태준이 부임한 이후인 1966년부터 대한중석 본사가 있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문래동 내 잔디 구장을 마련하고 그곳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해당 구장은 론그라운드나이터 시설이 갖추어져 당시로선 최신식 구장이었으며, 기타 제반 시설도 좋았기 때문에 효창구장과 경기가 중첩될시 금융단리그의 경기가 열리기도 했으며, 중석팀이 해체된 이후에도 한국으로 원정을 온 해외 국가대표팀의 연습구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주요 선수[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1. 중석(重石)은 텅스텐의 한자어이다.
  2. 중석불(重石弗)은 중석을 수출하여 번 달러라는 뜻으로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정권이 이 중석불로 밀가루 및 비료를 구입하여 흉작과 비료부족으로 궁핍한 삶을 살고 있던 농민에게 비싼값에 팔아 폭리를 취한 사건으로 이승만정부 최대의 비리사건 중 하나이다.
  3. 박태준은 쿠데타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박정희는 쿠데타 실패시를 대비하여 전날 가족들을 박태준에 맏길정도로 신뢰하던 사이였다.
  4. 초경공구(super hard tool)를 생산하는 사업, 기존 공구의 경도를 높이기 위해 경도가 높은 턴스텐을 사용한다. 텅스텐을 단순히 채굴하는데에서 벗어나 텅스텐을 제련하여 제품을 만드는 2차산업이다.
  5. 김현회 '철강왕' 박태준의 못 말리는 축구사랑 일대기 - 2011년 5월 18일,네이트 김현회 칼럼
  6. 서울 경기에서는 0:0 무승부, 말레이시아 원정에서는 0:1 패배를 기록하며 결승전에 오르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