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천
박이천(1947년 7월 26일 ~ )는 대한민국 국적의 축구 선수이자 축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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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편집]
선수 프로필[편집]
지도자 프로필[편집]
선수 생활[편집]유소년 시절[편집]서울 영도중학교, 동북고등학교, 중앙대학교를 나온 선수이다. 영도중 시절까지 육상 선수로 활동하였으나 중 3때 우연한 기회로 영도중 축구부에 합류하였고[1] 이후 영도중ㆍ영등포공고 축구부 코치를 겸임하고 있었던 윤재봉 씨의 설득으로 축구 선수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영등포공고에 진학하였다가, 영등포공고 축구부가 해체 위기에 직면하자 이회택 씨의 추천으로 동북고등학교로 전학을 가 박병석 코치의 조련을 받으며 급성장하였고 이후 박병석 코치를 따라 중앙대학교에 진학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성인 시절[편집]중앙대학교 1학년을 마친 후 양지 축구단에 차출되면서 군복무 생활을 시작하였고, 1970년까지 군복무를 이어갔다. 이후 1971년 국민은행 축구단에 입단하며 실업 선수 생활과 국가대표 생활을 병행하였으며, 1974년을 끝으로 국가대표와 실업 선수 생활을 정리하였다. 선수 생활 은퇴 후에는 광운전자공고 축구부 코치를 맡아 1년간 활동하였으나, 1976년 변호영 선수의 권유로[2] 홍콩 세미 프로 축구 팀인 해봉에 입단해 선수 생활 복귀를 선언, 이후 해봉을 홍콩 1부 리그로 승격시키는데 크게 기여하며 홍콩 축구계에 한국인 선수 영입 붐을 일으키는데 일조하였다. 이후 홍콩 사우스 차이나 AA로 이적해, 1980년까지 활동한 뒤 최종적으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국가대표 시절[편집]중앙대학교 1학년 시절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에 발탁되었던 것을 시작으로, 양지 축구단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국가대표 초기에는 백호 국가대표팀으로 밀리는 등 다소 고생하였으나, 1970년 아시안게임에서 2골을 성공시킨 뒤 국가대표 붙박이로 안착하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아시안게임 4강전에서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연장 후반 9분, 이회택 선수의 패스를 받아 논스톱 결승골을 터뜨려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하기도 했을 정도.[3] 이후 1972년 AFC 아시안컵에서는 4경기 연속 골을 기록하는 등 한국 대표팀의 골게터 윙어로 활약을 이어가다, 1974년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였다.
지도자 생활[편집]스타일[편집]플레이 스타일[편집]빠른 발과 골결정력을 두루 갖춘 정통파 윙어 였다. 훗날 정규풍, 차범근, 허정무 등이 합류하자 이회택 선수와 함께 센터 포워드로 활약하기도 하는 등 197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국가대표 공격수로 활약하였다. 특히 문전 앞에서의 침착성 등이 좋아 페널티킥도 도맡아 찼다는 후문.
지도 스타일[편집]에피소드[편집]
같이 보기[편집]외부 링크[편집]나의 선수시절 5, 박이천 폭발적인 스피드로 70년대 한국축구 풍미
참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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