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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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금석 (1904년 ~ 1995년 12월 26일) 은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 선수이자 축구 지도자셨다.


출생과 성장[편집]

1904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14세의 나이로 경성에서 열렸던 소년축구대회 전북 대표로 참가한 채금석 씨는 대회에서 발군의 활약을 보였으며, 당시 한국축구의 강호였던 경신학교의 스카웃 제의를 받게된다. 경신학교에 진학한 채금석 씨는 일생의 벗인 김용식 씨를 만나 경신학교를 국내 최강의 팀으로 성장시키는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벌어지자 채금석 씨는 임창식 선수 등과 함께 경신학교의 항일운동 동참을 주도하였다 일제 경관에게 발각되었으며, 다행히 일제의 추적을 피해 경성을 빠져나와 고향 군산으로 내려가 한동안 숨어지내셔야만 했다.


지도자 생활[편집]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앞둔 일제는 채금석 씨를 비롯해 김용식, 김영근 등 조선축구계의 전설적인 선수들도 일본 국가대표로 발탁하는듯한 움직임을 보였으나, 결국 김용식 씨를 제외하고는 베를린 올림픽 본선에 나서질 못하였다. 결국 채금석 씨는 이후 평양 축구단에서 잠시 활동한 것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군산을 비롯해 호남 일대를 돌아다니며 축구를 가르치는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셨다. 광복 이후, 군산 경찰축구팀을 창단하기도 하셨으며 1950년대 후반부터는 채금석 씨 본인의 자택에 30여명의 어린 선수들이 축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선수들의 후원, 육성하는 일을 20년 넘게 진행하셨다.[1] 이 때 채금석 씨의 교육으로 국가대표로 성장한 선수가 최재모, 최상철, 남대식, 유동춘, 유동관 등의 선수였다.


금석배축구대회 탄생과 별세[편집]

처음 채금석 씨가 군산에서 축구 교육을 시작할때만 해도 대한축구협회는 어떠한 관심도 지원도 해주질 않았지만, 그로부터 40년이 지나자 채금석 옹은 군산축구 뿐만 아니라 호남축구의 대부로 존경받으며 수많은 축구계 인사들을 키워낸 참된 지도자로 조명받았다. 그제서야 대한축구협회는 전북축구협회 등의 후원을 통해 1992년 금석배전국학생축구대회를 개최하여 채금석 옹의 뜻을 기리는 대회를 만들었다. 이후 채금석 옹은 1995년 12월 26일 노환으로 별세하셨다. 향년 91세.


에피소드[편집]

  • 여섯살 터울인 김용식 씨와 평생의 벗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두 분이 처음 만난 것은 경신중학에 재학 중이던 1926년께였는데, 당시 축구로 맺어진 두 사람은 '우리 모두 대선수가 되어보자. 이를 위해서는 술/담배/노름/여자 등에 일체 정신을 팔지 말고, 오로지 축구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서약하였고, 그 약속을 70이 넘은 나이까지 잊지않고 지키셨다고 한다.
  • 김용식 씨와 함께 활약하던 시절, 채금석 씨의 별명은 오토바이였다. 당시 경성에서 가장 빠른 탈것은 오토바이였기 때문에 스피드가 넘쳤던 채금석 씨를 빗대는데 별명으로 쓰였던 것. 이처럼 스피드와 반사 신경이 좋으셨던 덕분에 축구 외 다른 스포츠 종목에도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경신학교 시절 한때는 테니스에 빠져서 전국대회에 나선 경력도 있으시다고 한다.
  •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인해 경성학교에서 퇴학되셨다가, 1985년이 되어서야 경신고등학교 측으로부터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으셨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1. 오늘날로 치면 '채금석축구교실'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