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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성고 축구부 ==
 
== 계성고 축구부 ==
 
[[파일:계성1937.jpg‎|thumb|335px|계성고축구부(1937년 5월 부산 원정기념 대구역)]]
 
[[파일:계성1937.jpg‎|thumb|335px|계성고축구부(1937년 5월 부산 원정기념 대구역)]]
'계성고 축구부의 전성기는 1930년대였. 영남일대에서는 어느 학교나 단체도 감히 도전하지 못하였다. 전국대회에 A,B팀이 출전하여 동교끼리 결승전을 할만큼 상대가 없었다'<ref>계성고등학교 홈페이지 학교역사 내용 발췌. 당시의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전조선축구대회]]의 우승, 준우승팀 뿐이라 확인할 길이 없지만 당시 전조선축구대회도 일부팀(숭실학원,평양,함흥축구단)을 제외하곤 서울까지 원정가기가 만만치 않았을 터이므로 전조선축구대회에 우승명단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ref>라고 전한다. 42년 학교체육에서 구기종목을 폐기하라는 총독부 지시에 따라 구기종목이 없어진 후 해방후에도 농구부만 부활하고 축구부는 없는 상태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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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고 축구부의 전성기는 1930년대였다. 영남일대에서는 어느 학교나 단체도 감히 도전하지 못하였다. 전국대회에 A,B팀이 출전하여 동교끼리 결승전을 할만큼 상대가 없었다''''<ref>계성고등학교 홈페이지 학교역사 내용 발췌. 당시의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전조선축구대회]]의 우승, 준우승팀 뿐이라 확인할 길이 없지만 당시 전조선축구대회도 일부팀(숭실학원,평양,함흥축구단)을 제외하곤 서울까지 원정가기가 만만치 않았을 터이므로 전조선축구대회에 우승명단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ref>라고 전한다. 42년 학교체육에서 구기종목을 폐기하라는 총독부 지시에 따라 구기종목이 없어진 후 해방후에도 농구부만 부활하고 축구부는 없는 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러다 1973년부터 [[체육특기자]]에 대한 배정<ref>1963년부터 시작된 체육특기자 제도가 73년도에 대대적으로 개편되었는데 체육특기자들을 반강제적(?)으로 각 학교에 입학시키라는 조치였다. 강제성은 띄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군사정권에서의 권유는 강제성을 띄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거의 대부분의 학교에서 운동부가 생겼는데 가장 선호된 것이 추가 시설이 필요없는 육상부였으며 그 다음이 인기 있는 구기종목이었다. 강제로 시작되었지만 권역별 배정으로 인해 서울의 유명 학교 운동부의 지방 우수 선수 스카우트가 없어지면서 지방의 학교 운동부가 활성화 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구의 경우 이 조치로 인해 청구고, 협성고, 대륜고, 계성고에 축구부가 생기기 되었다.</Ref>이 시작되면서 73년말 다시 축구부 창단을 선언하며 부활했다.  
 
그러다 1973년부터 [[체육특기자]]에 대한 배정<ref>1963년부터 시작된 체육특기자 제도가 73년도에 대대적으로 개편되었는데 체육특기자들을 반강제적(?)으로 각 학교에 입학시키라는 조치였다. 강제성은 띄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군사정권에서의 권유는 강제성을 띄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거의 대부분의 학교에서 운동부가 생겼는데 가장 선호된 것이 추가 시설이 필요없는 육상부였으며 그 다음이 인기 있는 구기종목이었다. 강제로 시작되었지만 권역별 배정으로 인해 서울의 유명 학교 운동부의 지방 우수 선수 스카우트가 없어지면서 지방의 학교 운동부가 활성화 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구의 경우 이 조치로 인해 청구고, 협성고, 대륜고, 계성고에 축구부가 생기기 되었다.</Ref>이 시작되면서 73년말 다시 축구부 창단을 선언하며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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