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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고 축구부의 전성기는 1930년대였다. 영남일대에서는 어느 학교나 단체도 감히 도전하지 못하였다. 전국대회에 A,B팀이 출전하여 동교끼리 결승전을 할만큼 상대가 없었다''''<ref>계성고등학교 홈페이지 학교역사 내용 발췌. 당시의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전조선축구대회]]의 우승, 준우승팀 뿐이라 확인할 길이 없지만 당시 전조선축구대회도 일부팀(숭실학원,평양,함흥축구단)을 제외하곤 서울까지 원정가기가 만만치 않았을 터이므로 전조선축구대회에 우승명단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ref>라고 전한다. 42년 학교체육에서 구기종목을 폐기하라는 총독부 지시에 따라 구기종목이 없어진 후 해방후에도 농구부만 부활하고 축구부는 없는 상태가 유지되었다.  
 
''''계성고 축구부의 전성기는 1930년대였다. 영남일대에서는 어느 학교나 단체도 감히 도전하지 못하였다. 전국대회에 A,B팀이 출전하여 동교끼리 결승전을 할만큼 상대가 없었다''''<ref>계성고등학교 홈페이지 학교역사 내용 발췌. 당시의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전조선축구대회]]의 우승, 준우승팀 뿐이라 확인할 길이 없지만 당시 전조선축구대회도 일부팀(숭실학원,평양,함흥축구단)을 제외하곤 서울까지 원정가기가 만만치 않았을 터이므로 전조선축구대회에 우승명단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ref>라고 전한다. 42년 학교체육에서 구기종목을 폐기하라는 총독부 지시에 따라 구기종목이 없어진 후 해방후에도 농구부만 부활하고 축구부는 없는 상태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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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973년부터 [[체육특기자]]에 대한 배정<ref>1963년부터 시작된 체육특기자 제도가 73년도에 대대적으로 개편되었는데 체육특기자들을 반강제적(?)으로 각 학교에 입학시키라는 조치였다. 강제성은 띄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군사정권에서의 권유는 강제성을 띄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거의 대부분의 학교에서 운동부가 생겼는데 가장 선호된 것이 추가 시설이 필요없는 육상부였으며 그 다음이 인기 있는 구기종목이었다. 강제로 시작되었지만 권역별 배정으로 인해 서울의 유명 학교 운동부의 지방 우수 선수 스카우트가 없어지면서 지방의 학교 운동부가 활성화 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구의 경우 이 조치로 인해 청구고, 협성고, 대륜고, 계성고에 축구부가 생기기 되었다. 구기종목 가운데 가장 창단비용이 들지 않는 종목이 축구. 공만 있으면 골대야 학교마다 설치되어 있으니.</Ref>이 시작되면서 73년말 다시 축구부 창단을 선언하며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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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973년부터 [[체육특기자]]에 대한 배정<ref>1963년부터 시작된 체육특기자 제도가 73년도에 대대적으로 개편되었는데 체육특기자들을 반강제적(?)으로 각 학교에 입학시키라는 조치였다. 강제성은 띄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군사정권에서의 권유는 강제성을 띄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거의 대부분의 학교에서 운동부가 생겼는데 가장 선호된 것이 추가 시설이 필요없는 육상부였으며 그 다음이 인기 있는 구기종목이었다. 강제로 시작되었지만 권역별 배정으로 인해 서울의 유명 학교 운동부의 지방 우수 선수 스카우트가 없어지면서 지방의 학교 운동부가 활성화 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구의 경우 이 조치로 인해 청구고, 협성고, 대륜고, 계성고에 축구부가 생기기 되었다. 구기종목 가운데 가장 창단비용이 들지 않는 종목이 축구. 공만 있으면 골대야 학교마다 설치되어 있으니.</Ref>이 시작되면서 73년말 다시 축구부 창단을 선언하며 부활했다. 팀이 창단되고 난 후 [[오세권]]을 중심으로 전성기를 맞아 지역 [[청구고]]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대결했다.<ref>1975년 경북 고교축구대회 당시청구고와의 결승전에서 1대0으로 앞선 후반 종료 3분전 패널티킥을 허용해 한골먹고 1분후 다시 한골을 먹어 역전패후 준우승에 그쳤는데 계성고 졸업생 및 재학생 응원단 2000여명중 100여명이 단상을 점거하고 기물을 부수면서 경기무효를 주장하였으며, 다시 800명이 중구 공평동 경북체육회까지 1.5km 가두 시위, 다시 범어동 대구MBC로 진출하려다 경찰에 의해 해산..ㅎㄷㄷㄷㄷ</ref>  문교부장관기 전국 고교축구대회에서는 서울 [[중동고]]와 2년 연속 결승에서 만나 승부를 가리지 못해 공동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하다가 1981년 봄 팀을 해체했다. 당시 체육특기자는 학생수의 3%를 선발할 수 있었는데 계성고 학년 정원이 700명이었고 3%는 21명. 21명의 쿼터로는 유도부, 농구부, 축구부에 유력선수를 모두를 스카우트 할 수 없다는 한계와 재정적 부담이 해체 원인이었다. 계성중을 거쳐 계성고에 입학했던 [[황보관]]은 1학년때 축구부가 해체되어버리는 상황을 맞이해서 눈물을 머금고 [[서울체고]]로 전학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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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이 창단되고 난 후 [[오세권]]을 중심으로 전성기를 맞아 지역 [[청구고]]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대결했다.<ref>1975년 경북 고교축구대회 당시청구고와의 결승전에서 1대0으로 앞선 후반 종료 3분전 패널티킥을 허용해 한골먹고 1분후 다시 한골을 먹어 역전패후 준우승에 그쳤는데 계성고 졸업생 및 재학생 응원단 2000여명중 100여명이 단상을 점거하고 기물을 부수면서 경기무효를 주장하였으며, 다시 800명이 중구 공평동 경북체육회까지 1.5km 가두 시위, 다시 범어동 대구MBC로 진출하려다 경찰에 의해 해산..ㅎㄷㄷㄷㄷ</ref>  문교부장관기 전국 고교축구대회에서는 서울 [[중동고]]와 2년 연속 결승에서 만나 승부를 가리지 못해 공동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하다가 1981년 봄 팀을 해체했다. 당시 체육특기자는 학생수의 3%를 선발할 수 있었는데 계성고 학년 정원이 700명이었고 3%는 21명. 21명의 쿼터로는 유도부, 농구부, 축구부에 유력선수를 모두를 스카우트 할 수 없다는 한계와 재정적 부담이 해체 원인이었다. 계성중을 거쳐 계성고에 입학했던 [[황보관]]은 1학년때 축구부가 해체되어버리는 상황을 맞이해서 눈물을 머금고 [[서울체고]]로 전학갈 수 밖에 없었다.
      
=== 출신 선수 ===
 
=== 출신 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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