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성고 축구부의 전성기는 1930년대였다. 영남일대에서는 어느 학교나 단체도 감히 도전하지 못하였다. 전국대회에 A,B팀이 출전하여 동교끼리 결승전을 할만큼 상대가 없었다''''<ref>계성고등학교 홈페이지 학교역사 내용 발췌. 당시의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전조선축구대회]]의 우승, 준우승팀 뿐이라 확인할 길이 없지만 당시 전조선축구대회도 일부팀(숭실학원,평양,함흥축구단)을 제외하곤 서울까지 원정가기가 만만치 않았을 터이므로 전조선축구대회에 우승명단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ref>라고 전한다. 42년 학교체육에서 구기종목을 폐기하라는 총독부 지시에 따라 구기종목이 없어진 후 해방후에도 농구부만 부활하고 축구부는 없는 상태가 유지되었다. | ''''계성고 축구부의 전성기는 1930년대였다. 영남일대에서는 어느 학교나 단체도 감히 도전하지 못하였다. 전국대회에 A,B팀이 출전하여 동교끼리 결승전을 할만큼 상대가 없었다''''<ref>계성고등학교 홈페이지 학교역사 내용 발췌. 당시의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전조선축구대회]]의 우승, 준우승팀 뿐이라 확인할 길이 없지만 당시 전조선축구대회도 일부팀(숭실학원,평양,함흥축구단)을 제외하곤 서울까지 원정가기가 만만치 않았을 터이므로 전조선축구대회에 우승명단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ref>라고 전한다. 42년 학교체육에서 구기종목을 폐기하라는 총독부 지시에 따라 구기종목이 없어진 후 해방후에도 농구부만 부활하고 축구부는 없는 상태가 유지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