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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통산기록은 [[리그컵]]기록 포함. 2014년 1월 1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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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통산기록은 [[리그컵]]기록 포함. 2015년 3월 1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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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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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넣는 스트라이커에서 팀의 간판 공격수로 성장한 선수이다. <del>혹자는 K리그에서 RPG를 해온 선수라고 평하기도.</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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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넣는 스트라이커에서 팀의 간판 공격수로 성장한 선수이다. <del>혹자는 K리그에서 RPG를 해온 선수라고 평하기도.</del>
       
== 프로 입단 이전 ==
 
== 프로 입단 이전 ==
신장 190cm의 장신의 타겟형 스트라이커이다. [[부평고등학교]] 재학시절, [[이천수]], [[최태욱]], [[김정우]], [[박병규]], [[이준기]] 등 모조리 훗날 프로 1군에서 뛰게된 선후배들과 경기를 치루면서 주목을 받았다. 무지막지한 부평고 공격진 스쿼드 속에서 박성호 선수는 고교선수로는 드문 190이 넘는 타겟이라 프로의 주목을 좀 더 일찍 받을 수 있었다. 결국 [[2001년 드래프트]]에서 [[안양 LG]]에 고교 우선 지명으로 입단하게 되었는데, 당시 박성호 선수와 입단동기로는 [[한정화]], [[안성훈]] 선수등이 있었다. 당시 안양의 감독인 [[조광래]]는 소위 [[조광래의 아이들]] 육성을 위해 [[김호]] 당시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에 맟서 경쟁적으로 고교 졸업 선수들을 지명하고 있었고, 이와 같은 경쟁의 과잉에 따라 박성호 선수는 부평고를 졸업하자마자 일찌감치 프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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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190cm의 장신의 타겟형 스트라이커이다. [[부평고등학교]] 재학시절, [[이천수]], [[최태욱]], [[김정우]], [[박병규]], [[이준기]] 등 모조리 훗날 프로 1군에서 뛰게된 선후배들과 경기를 치루면서 주목을 받았다. 무지막지한 부평고 공격진 스쿼드 속에서 박성호 선수는 고교선수로는 드문 190에 가까운 타겟이라 프로의 주목을 좀 더 일찍 받을 수 있었다. 결국 [[2001년 드래프트]]에서 [[안양 LG]]에 고교 우선 지명으로 입단하게 되었는데, 당시 박성호 선수와 입단동기로는 [[한정화]], [[안성훈]] 선수등이 있었다. 당시 안양의 감독인 [[조광래]]는 소위 [[조광래의 아이들]] 육성을 위해 [[김호]] 당시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에 맟서 경쟁적으로 고교 졸업 선수들을 지명하고 있었고, 이와 같은 경쟁의 과잉에 따라 박성호 선수는 부평고를 졸업하자마자 일찌감치 프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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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월, [[부산 아이파크]]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은 박성호 선수는, [[김판곤]] 당시 부산 수석코치의 낙점을 받아 키프로스 전지훈련에 참가하게된다. <ref>당시 박성호 선수와 함께 부산에 입단한 선수는 [[김홍철]], [[장우창]], [[김태영2|김태영]], [[차지호]] 등이 있었다. 박성호 선수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선수들은 현재는 프로와 인연이 없는 상태..</ref> 2006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부산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뛰기 시작한 박성호는 극악에 달하는 골결정력과 중앙에 붙어있질 못하고 사이드로 처지는 플레이 때문에 부산팬들에게 질타를 받았다. 여기에 볼경합시 팔꿈치로 상대 수비수를 가격하는 경우가 많아, 애써잡은 기회를 공격자 파울로 끊어먹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여러모로 까일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던게 당연했다. (문제는 박성호 외에 달리 쓸 타겟 스트라이커도 없었다는 점. 당시 [[포터필드]] 감독이 데려왔던 [[아트]]나 서브 공격수인 [[오철석]], [[부영태]] 등은 박성호 선수에게도 밀리는 상황이었다)
 
2006년 1월, [[부산 아이파크]]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은 박성호 선수는, [[김판곤]] 당시 부산 수석코치의 낙점을 받아 키프로스 전지훈련에 참가하게된다. <ref>당시 박성호 선수와 함께 부산에 입단한 선수는 [[김홍철]], [[장우창]], [[김태영2|김태영]], [[차지호]] 등이 있었다. 박성호 선수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선수들은 현재는 프로와 인연이 없는 상태..</ref> 2006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부산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뛰기 시작한 박성호는 극악에 달하는 골결정력과 중앙에 붙어있질 못하고 사이드로 처지는 플레이 때문에 부산팬들에게 질타를 받았다. 여기에 볼경합시 팔꿈치로 상대 수비수를 가격하는 경우가 많아, 애써잡은 기회를 공격자 파울로 끊어먹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여러모로 까일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던게 당연했다. (문제는 박성호 외에 달리 쓸 타겟 스트라이커도 없었다는 점. 당시 [[포터필드]] 감독이 데려왔던 [[아트]]나 서브 공격수인 [[오철석]], [[부영태]] 등은 박성호 선수에게도 밀리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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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는 멀대같이 크면서, 지지리도 골을 못넣던 박성호를 두고 [[국내축구갤러리]]에서는 박성호 선수와 비슷한 성향의 공격수인 [[손정탁]], [[황연석]]을 한데 묶어, [[타워팰리스]], [[트리플 타워]], [[손정탁 클럽]] 등의 조어를 만들어냈으며 이 전통은 현재 [[삼동현]]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_-.. 여기에 당시 박성호 선수가 닮고 싶은 선수로 '[[판니 스텔루이]] 를 꼽아, 박성호 선수의 별명은 '박니'로 통했다. 당시 최고의 득점 감각을 자랑하고 있었던 판니와 비교하여 박성호의 골결정력을 조롱하는 의미로 쓰였다. <ref>원래는 까려고 만든 별명인데 어감이 좋은지 대전에서 에이스를 맡고 있는 요새도 애용중인 별명이 되었다. 선수 본인도 자신을 박니로 부른다는 점에 대해서 개의칠 않는듯.</ref> 그렇게 리그 15경기를 넘게 소화한 이후에야, 2006년 8월, 대전전에서 1골 1도움을 올리며 프로 데뷔 6년만에 데뷔골을 신고하게 되었다. [[김판곤]] 당시 감독대행은, '한골을 넣었으니 앞으로 심리적으로 압박감이 덜해 더 잘할 것'이라 기대했으나, 결국 2006년 성적은 2골 1도움으로 광주전에 1골을 추가하는데 그쳤다. 공격포인트 3개를 기록한 박성호 선수의 시즌 출장 시간은 1833분이었다.<ref>611분당 공격포인트 1개씩 기록한 셈. 반면 경기당 평균 파울개수는 1.8개에 달했다. 누가 보면 수비수인줄 알듯</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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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는 멀대같이 크면서, 지지리도 골을 못넣던 박성호를 두고 [[국내축구갤러리]]에서는 박성호 선수와 비슷한 성향의 공격수인 [[손정탁]], [[황연석]]을 한데 묶어, [[타워팰리스]], [[트리플 타워]], [[손정탁 클럽]] 등의 조어를 만들어냈으며 이 전통은 현재 [[삼동현]]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_-.. 여기에 당시 박성호 선수가 닮고 싶은 선수로 [[뤼트 판 니스텔루이]]를 꼽아, 박성호 선수의 별명은 '박니'로 통했다. 당시 최고의 득점 감각을 자랑하고 있었던 판니와 비교하여 박성호의 골결정력을 조롱하는 의미로 쓰였다. <ref>원래는 까려고 만든 별명인데 어감이 좋은지 대전에서 에이스를 맡고 있는 요새도 애용 중인 별명이 되었다. 선수 본인도 자신을 박니로 부른다는 점에 대해서 개의칠 않는듯.</ref> 그렇게 리그 15경기를 넘게 소화한 이후에야, 2006년 8월, 대전전에서 1골 1도움을 올리며 프로 데뷔 6년만에 데뷔골을 신고하게 되었다. [[김판곤]] 당시 감독대행은, '한골을 넣었으니 앞으로 심리적으로 압박감이 덜해 더 잘할 것'이라 기대했으나, 결국 2006년 성적은 2골 1도움으로 광주전에 1골을 추가하는데 그쳤다. 공격포인트 3개를 기록한 박성호 선수의 시즌 출장 시간은 1833분이었다.<ref>611분당 공격포인트 1개씩 기록한 셈. 반면 경기당 평균 파울개수는 1.8개에 달했다. 누가 보면 수비수인줄 알듯</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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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 [[포항 스틸러스]] 감독은 타겟 스트라이커 자원으로 박성호를 낙점하였다고 하며, 영입에 만족감을 표시했다..<ref>박성호가 대전으로 떠났던 것은 황선홍 감독이 선임되기 전에 두 팀의 프론트가 협의해서 한 일이었으므로 황선홍 감독이 부산 시절 내버린 박성호를 다시 데려온 것은 아니다. 참고자료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39&aid=0000016688]</ref> 하지만 2012년 5월 현재까지, 박성호는 기대 이하의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포항의 ACL 조별예선 탈락과 중위권 랭크에 기여(?)하고 있다. 덕분에 팬들 사이에서는 박성호를 사오다니, 대전 시티즌의 유상철 감독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ref>박성호와 투톱을 이루는 [[고무열]]도 박성호와 그다지 다를바 없는 움직임으로 욕을 먹고있지만, [[포철공고]] 유스 출신이라 쉴드(?)가 쳐지는 편. 박성호는 이런것 마저 없어서 더욱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있다.</ref> 결국 포항 입단 후 2012년 8월 현재까지 20경기 남짓 나왔음에도 무득점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여름이 지나가면서 슬슬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시작하더니 포항의 주포로 뛰어오르는데까지 성공하였다. 급기야 2012년 10월 20일, [[FA컵 2012]] 결승전에서는 [[승부차기]]로 넘어갈듯하던 연장 후반 13분, 백헤딩으로 결승골을 터뜨리며 포항의 FA컵 우승을 안김과 동시에 [[황선홍]] 감독의 우승 징크스<ref>2008년 부산 아이파크 감독으로 감독 생활을 시작한 황선홍은 2009년 컵대회 준우승, 2010년 FA컵 준우승 등을 기록하였으나 우승컵은 들지못하고 있었다.</ref>를 날려주었다. 2013년 초반에도 박니의 명성에 맞게 삽을 푸고 있다가. 8월이 넘어가고 9월 스플릿 라운드에 들어가자 공격력이 대폭발, 포항을 불안하지만 선두에 계속 올려놓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내고 있다. 특히 후반 추가시간에만 3골을 뽑아내는 결정력으로 '''가을<del>전어</del>남자''', '''골든보이'''라 불리고 있다. 그리고 2013년 소속팀의 FA컵과 K리그 클래식 더블을 달성하는데 공헌하는데도 성공.. <del>이제 태극마크만 달면 된다.</del> 하지만 박선수는 2014시즌을 앞두고, FA로 풀렸으며 2014년 1월 말 J2의 요코하마 FC로 이적하였다. 다른 K리그 팀들도 탐냈지만 FA 이적료와 연봉을 합친 금액이 워낙 고액이라 여타 팀들도 제의를 넣지 못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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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 [[포항 스틸러스]] 감독은 타겟 스트라이커 자원으로 박성호를 낙점하였다고 하며, 영입에 만족감을 표시했다..<ref>박성호가 대전으로 떠났던 것은 황선홍 감독이 선임되기 전에 두 팀의 프론트가 협의해서 한 일이었으므로 황선홍 감독이 부산 시절 내버린 박성호를 다시 데려온 것은 아니다. 참고자료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39&aid=0000016688]</ref> 하지만 2012년 5월 현재까지, 박성호는 기대 이하의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포항의 ACL 조별예선 탈락과 중위권 랭크에 기여(?)하고 있다. 덕분에 팬들 사이에서는 박성호를 사오다니, 대전 시티즌의 유상철 감독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ref>박성호와 투톱을 이루는 [[고무열]]도 박성호와 그다지 다를바 없는 움직임으로 욕을 먹고 있지만, [[포철공고]] 유스 출신이라 쉴드(?)가 쳐지는 편. 박성호는 이런것 마저 없어서 더욱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ref> 결국 포항 입단 후 2012년 8월 현재까지 20경기 남짓 나왔음에도 무득점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여름이 지나가면서 슬슬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시작하더니 포항의 주포로 뛰어오르는데까지 성공하였다. 급기야 2012년 10월 20일, [[FA컵 2012]] 결승전에서는 [[승부차기]]로 넘어갈듯하던 연장 후반 13분, 백헤딩으로 결승골을 터뜨리며 포항의 FA컵 우승을 안김과 동시에 [[황선홍]] 감독의 우승 징크스<ref>2008년 부산 아이파크 감독으로 감독 생활을 시작한 황선홍은 2009년 컵대회 준우승, 2010년 FA컵 준우승 등을 기록하였으나 우승컵은 들지못하고 있었다.</ref>를 날려주었다. 2013년 초반에도 박니의 명성에 맞게 삽을 푸고 있다가. 8월이 넘어가고 9월 스플릿 라운드에 들어가자 공격력이 대폭발, 포항을 불안하지만 선두에 계속 올려놓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내고 있다. 특히 후반 추가시간에만 3골을 뽑아내는 결정력으로 '''가을<del>전어</del>남자''', '''골든보이'''라 불리고 있다. 그리고 2013년 소속팀의 FA컵과 K리그 클래식 더블을 달성하는데 공헌하는데도 성공.. <del>이제 태극마크만 달면 된다.</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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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박선수는 2014시즌을 앞두고 FA 자격을 얻었는데, 포항에서 신화용을 제외한 FA 선수들과의 재계약을 포기하면서 2014년 1월 말 J2의 요코하마 FC로 이적하였다. 다른 K리그 팀들도 탐냈지만 FA 이적료와 연봉을 합친 금액이 워낙 고액이라 여타 팀들도 제의를 넣지 못했다고. 이적 후 박 선수는 31경기 3골이라는 좋지 않은 성적으로 1년 만에 다시 무적 선수가 되어버렸는데, 포항은 포항대로 원톱 부재에 시달린 탓에 어떻게든 잡았어야 했다고 아쉬워하는 팬들이 많았다. 결국 FA로 다시 친정팀에 복귀하여 활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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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피소드 =
 
= 에피소드 =
* [[손정탁 클럽]]의 창립 발기인(?) 중 한명. [[이동국]] 선수와 함께 손정탁 클럽 멤버중 가장 금의환향한 케이스로 평가되기도 했는데.. 2012년 포항에서 다시 예전의 명성에 버금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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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탁 클럽]]의 창립 발기인(?) 중 한명. [[이동국]] 선수와 함께 손정탁 클럽 멤버중 가장 금의환향한 케이스로 평가되기도 했는데.. 아무튼 계절에 따라 평가가 계속해서 바뀌는 독특한 캐릭터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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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82년생]][[분류:부평고등학교의 선수]][[분류:안양 LG 치타스의 선수]][[분류:경찰청 축구단의 선수]][[분류:부산 아이파크의 선수]][[분류:대전 시티즌의 선수]][[분류:포항 스틸러스의 선수]][[분류:해외파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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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82년생]][[분류:부평고등학교의 선수]][[분류:안양 LG 치타스의 선수]][[분류:경찰청 축구단의 선수]][[분류:부산 아이파크의 선수]][[분류:대전 시티즌의 선수]][[분류:포항 스틸러스의 선수]][[분류:해외진출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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