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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4월 5일 (월) 16:35
=== 1. 소개 ===
67년 2월부터 70년 3월까지 존속한, 중앙정보부 소속의 축구팀이었다.
한국 축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설적인 축구팀이다.
=== 2. 창단 배경 ===
직접적인 배경은 [[1966년 런던 월드컵]]에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이 보여준 월드컵 8강행 충격에 있었다.
당시 북한의 월드컵 8강은 세계적인 이슈이기도 했지만, 특히 남북간 체제 경쟁의 구도가 극에 달했던 60년대 후반,
북한의 선전은 남한 정부에게 그 충격의 강도는 지대한 것이었다.
특히, 북한팀과는 언제든 월드컵 아시아 예선이나 올림픽 아시아 예선등에서 맟땋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부담감은 더한 것이었고, 그 결과, 당시 중앙정보부 부방이었던 김형욱은
국가적 지원하에 북한 축구팀을 꺽을 역량을 가진 남한 최고의 축구팀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참고)=====
비슷한 이유로 올림픽에 대한 국가적 지원 방향성도 확립되었다. 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북한에 최초의 금메달을 안긴(사격 남자) 이호준 선수는
수상 소감에서 '원수의 심장을 겨누는 심정으로 쏘았다'는 유명한 발언을 남기며 남한을 충격으로 몰아넣었고, 이후 올림픽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와
지원이 늘어나게 되었다.
=== 3. 선수단 구성 ===
양지 축구단의 선수단은 당시 육군, 해군, 공군 등 3군에 소속되있던 군복무 중인 실업 축구 선수들을 주축으로,
대학 재학 중의 군 복무 회피(?) 선수들 중 기량이 출중했던 선수들을 모두 긁어모아 창설했다.
감독은 50년대 최고의 스트라이커이자,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국가대표였던 고 [[최정한]] 씨가 맡았고,
코치는 [[강준영]] (후에 72년 뮌헨 올림픽 아시아 예선 감독) 씨가 있었다.
==== 양지 축구단 선수 명단 ====
선수단은 (FB = [[풀백]], HB = [[하프백]], CF = [[센터 포워드]])
< 포지션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어 불확실. 이 명단이 전부가 아님. 추가 예정>
GK [[이세연]], [[오인복]]
FB [[김호]], [[김정남]], [[허윤정]], [[조정수]], [[이호영]],
HB [[김삼락]], [[이영근]], [[박수일]], [[최재모]], [[김영섭]], [[최운향]]
CF [[정병탁]], [[이회택]], [[임국찬]], [[서윤찬]]
등 국내 최고의 선수들을 모을 수 있었다.
=== 4. 활동 경력 ===
창단하자마자, 이듬해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를 석권하며 국내 최강팀임을 확인한 양지 축구단은
이후 주로 해외 팀을 초청하여 경기를 하거나 홍콩이나 일본 등지로 원정을 떠나는 등,
남한 대표 축구팀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특히 120일에 달하는 유럽 전지 훈련 등은 당시로서는 [[대한축구협회]]가 꿈도 못꾸던 특전이었다.
여기에 당시 이문동에 위치했던 중앙정보부 청사내 잔디 연습 구장은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안에 드는
서울시 내에는 유일했던 천연잔디 구장이었고 양지 축구단은 이를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이문동 연습 구장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국가대표 훈련도 중앙정보부의 허가를 받아야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양지 축구단에 대한 배려는 특기할만 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여기에 군복무 기간 인정과 장교에 준하는 대우 여건등, 여러 면에서 선진적이었던 축구 외적 환경도 특기할만 하다.
=== 5. 해체 과정과 의의 ===
그러나, 69년 10월 20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실각과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 등의 이유로
제일의 후원인과 존속 의의가 상실된 양지 축구단은 70년 3월 17일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국가 주도로 시도되었던 선진적인 축구팀에 대한 방향성 제시등은, 향후 프로 축구 태동과 실업 축구팀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다. 특히, 양지 축구단 멤버 대부분이 한국 축구의 발전을 이끈
주축으로 자리 매김하면서 양지 축구단의 역사적 의의는 현재도 상당히 인정받고 있다.
== 같이 보기 ==
*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 [[이회택]]
* [[대한중석]]
* [[대한축구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