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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퇴 및 해체 ===
=== 쇠퇴 및 해체 ===
[[1966년 런던 월드컵]]에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이 8강에 오르는 대파란을 일으키자, 1967년 2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의 지시로 창설한 [[양지 축구단]]에 대한중석 핵심 전력을 차출당하면서 전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그리고 축구단의 후원자이던 [[박태준]]이 1968년 포항제철로, 팀의 수장이었던 [[한홍기]] 감독은 1970년 [[청룡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옮겨감에 따라 대한중석 축구단의 존립 기반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1972년 경영상 흑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영합리화라는 명목으로 주 2일만 축구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근무를 하라는 회사의 방침에 선수들이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하면서 축구단은 해체되고 말았다. 해체 1년후인 1973년, 포항제철소 1기가 준공되자마자 [[박태준]]이 [[포항제철 축구단]]를 창단함에 따라 대한중석 축구단의 잔류 멤버와 스탭진, 양지 축구단이 해산되면서 예편한 [[이회택]] 등 신진 멤버가 합류해 [[포항제철 축구단]]을 구성했다. 감독부터 코치, 선수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멤버구성이 대한중석 축구단과 상동해, 대한중석 축구단을 [[포항 스틸러스]]의 전신으로 보기도 한다.
[[1966년 런던 올림픽]]에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이 8강에 오르는 대파란을 일으키자, 1967년 2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의 지시로 창설한 [[양지 축구단]]에 대한중석 핵심 전력을 차출당하면서 전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그리고 축구단의 후원자이던 [[박태준]]이 1968년 포항제철로, 팀의 수장이었던 [[한홍기]] 감독은 1970년 [[청룡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옮겨감에 따라 대한중석 축구단의 존립 기반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1972년 경영상 흑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영합리화라는 명목으로 주 2일만 축구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근무를 하라는 회사의 방침에 선수들이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하면서 축구단은 해체되고 말았다. 해체 1년후인 1973년, 포항제철소 1기가 준공되자마자 [[박태준]]이 [[포항제철 축구단]]를 창단함에 따라 대한중석 축구단의 잔류 멤버와 스탭진, 양지 축구단이 해산되면서 예편한 [[이회택]] 등 신진 멤버가 합류해 [[포항제철 축구단]]을 구성했다. 감독부터 코치, 선수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멤버구성이 대한중석 축구단과 상동해, 대한중석 축구단을 [[포항 스틸러스]]의 전신으로 보기도 한다.
== 홈구장 ==
== 홈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