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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시 조선의 축구 판도는 [[경성]]과 [[평양]]이 양분하고 있었다. 그 외 여타 지역은 이 구도를 뚫어낼 기반이 전무하다시피 했고 전국 대회에서의 성적도 일천한 상황이었다. 이는 함흥도 마찬가지라 함흥 출신으로 선수 생활을 지속한 이는 함흥영생학교<ref>함흥영생학교는 1909년 개교하여 1950년까지 존재하였던 중/고등학교이다. 한국전쟁 이후 폐교되었다가 1990년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에 재개교하였다.</ref> 출신으로 [[평양 축구단]]에서 포워드를 맡았던 이기환 뿐이었을 정도.<ref name="함축1">윤경헌, 최창신『축구 = 1 : 國技축구 그 찬란한 아침 』국민체육진흥공단, 1997, p111.</ref>. 그럼에도 함흥 축구단 창단을 위한 움직임은 꾸준히 전개되었다. 1933년 [[조선축구협회]] 창립 당시 함경도 대표로 참석한바 있는 [[이성주]]는, 이후에도 지방 이사(理事)의 자격으로 [[전조선축구대회]] 및 [[경평전]]을 자주 관전하였으며 조선축구협회 함경남도 지부를 결성하여 관북지방 축구 보급에 힘쓰는 한편, 1935년 이후 [[경평전]]이 중지 상태에 들어가자 함흥의 유지였던 [[김명학]]ㆍ경성축구단의 [[임흥순]] 단장ㆍ평양축구단의 [[최일]] 단장과 함께 모임을 갖고 경성/평양/함흥이 참가하는 [[3도시대항축구전]] 개최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축구 판도는 [[경성]]과 [[평양]]이 양분하고 있었다. 그 외 여타 지역은 이 구도를 뚫어낼 기반이 전무하다시피 했고 전국 대회에서의 성적도 일천한 상황이었다. 이는 함흥도 마찬가지라 함흥 출신으로 선수 생활을 지속한 이는 함흥영생학교<ref>함흥영생학교는 1909년 개교하여 1950년까지 존재하였던 중/고등학교이다. 한국전쟁 이후 폐교되었다가 1990년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에 재개교하였다.</ref> 출신으로 [[평양 축구단]]에서 포워드를 맡았던 이기환 뿐이었을 정도.<ref name="함축1">윤경헌, 최창신『축구 = 1 : 國技축구 그 찬란한 아침 』국민체육진흥공단, 1997, p111.</ref>. 그럼에도 함흥 축구단 창단을 위한 움직임은 꾸준히 전개되었다. 1933년 [[조선축구협회]] 창립 당시 함경도 대표로 참석한바 있는 [[이성주]]는, 이후에도 지방 이사(理事)의 자격으로 [[전조선축구대회]] 및 [[경평전]]을 자주 관전하였으며 조선축구협회 함경남도 지부를 결성하여 관북지방 축구 보급에 힘쓰는 한편, 1935년 이후 [[경평전]]이 중지 상태에 들어가자 함흥의 유지였던 [[김명학]]ㆍ경성축구단의 [[임흥순]] 단장ㆍ평양축구단의 [[최일]] 단장과 함께 모임을 갖고 경성/평양/함흥이 참가하는 [[3도시대항축구전]] 개최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1936년에는 함흥에서 [[이성주]], 홍덕수, 한설야<ref>KAPF의 대표 작가이자 북한에서 문화상을 지냈던 그 한설야가 맞다</ref>, 전상수 등 체육계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함흥체육회]]가 조직되었으며, 1937년에는 함흥영생고등보통학교(이하, 영생고보라 한다.) 및 함흥고등보통학교(이하, 함흥고보라 한다.) 출신들을 중심으로 함흥축구팀을 조직, 동년 가을 경성에서 열린 [[조선신궁경기대회]]에 출전해 준결승까지 진출하는 등 첫 전국대회 출전임에도 괜찮은 성적을 거두자 정식 축구단 창단의 여론이 높아지기에 이르렀다.<ref>大韓蹴球協會 편 『韓國蹴球百年史』라사라, 1986, p. 234.</ref>.
+이러한 노력 덕분에 1936년에는 함흥에서 [[이성주]], 홍덕수<ref>194ㆍ50년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골키퍼였던 [[홍덕영]] 씨의 큰형으로 알려져있다.</ref>, 한설야<ref>KAPF의 대표 작가이자 북한에서 문화상을 지냈던 그 한설야가 맞다</ref>, 전상수 등 체육계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함흥체육회]]가 조직되었으며, 1937년에는 함흥영생고등보통학교(이하, 영생고보라 한다.) 및 함흥고등보통학교(이하, 함흥고보라 한다.) 출신들을 중심으로 함흥축구팀을 조직, 동년 가을 경성에서 열린 [[조선신궁경기대회]]에 출전해 준결승까지 진출하는 등 첫 전국대회 출전임에도 괜찮은 성적을 거두자 정식 축구단 창단의 여론이 높아지기에 이르렀다.<ref>大韓蹴球協會 편 『韓國蹴球百年史』라사라, 1986, p. 234.</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