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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진원.jpg|섬네일|170px|대전 선수 시절의 신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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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진원.jpg|섬네일|170px|대전 선수 시절 신진원]]  
 
'''신진원''' (1974년 9월 27일 ~ ) 은 1997년부터 2004년까지 K리그에서 활약한 선수이다.
 
'''신진원''' (1974년 9월 27일 ~ ) 은 1997년부터 2004년까지 K리그에서 활약한 선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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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체 : 174cm / 63kg<ref>선수 시절</ref>
 
* 신체 : 174cm / 63kg<ref>선수 시절</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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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지션 : [[스트라이커]], [[공격형 미드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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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지션 : [[스트라이커]][[공격형 미드필더]]
    
* 학력 : [[연세대학교]] 졸업
 
* 학력 : [[연세대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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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대통령금배 축구대회]] 우수선수
 
: 1992년 [[대통령금배 축구대회]] 우수선수
 
: 1996년 [[전국대학축구선수권대회]] MVP
 
: 1996년 [[전국대학축구선수권대회]] MVP
: 1997년 [[K리그 신인왕]], [[K리그 시즌 베스트 11]] 미드필더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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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K리그 신인왕]][[K리그 시즌 베스트 11]] MF 부문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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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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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자 프로필 ==
 
== 지도자 프로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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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시티즌 입단 이전 ===
 
=== 대전 시티즌 입단 이전 ===
신진원 선수는 경기도 구리 토평 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하여, 서울 시흥초등학교, 문일중학교 그리고 [[문일고등학교]]를 다녔다. 특히, 문일고등학교 시절부터 팀내 스트라이커이자 플레이메이커로 대활약하였고 각종 대회에서 팀내 최고 득점자는 으레 신진원 선수였다고 한다. [[연세대학교]]로 진학후에는 [[김호곤]] 감독에게 조련을 받았다. 당시 김호곤 감독이 이끌던 1990년대 후반의 연세대는 황금의 라인업을 자랑했는데 수비의 [[장대일]], 미들의 [[서동원2|서동원]], [[서기복]], 그리고 공격의 [[신진원]], [[정상남]] 까지. 당시 연세대학교의 스쿼드는 대학권에서는 상대할 자가 없었고 실업축구 팀과도 박빙일 정도의 실력을 자랑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연세대 베스트 11의 꼭지점이라 할 플레이메이커와 윙포워드 몫은 으레 신진원 선수의 것이었고, 신진원 선수는 드리블 득점감각 패스 경기운영 어느 방면에서도 최고를 자랑했다. 다만 스피드가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1997년 대전 시티즌이 창단되면서 그 해 드래프트를 신청한 신진원 선수는 무조건 1순위로 대전에 지명될 것이라 여겨졌고 결국 예상대로였다. [[1997년 드래프트]]에서 신진원 선수를 비롯, [[서동원2|서동원]] 등 연세대 미드필더 졸업 선수들 모두가 대전에 입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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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원 선수는 경기도 구리 토평 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하여, 서울 시흥초등학교, 문일중학교 그리고 [[문일고등학교]]를 다녔다. 특히, 문일고등학교 시절부터 팀내 스트라이커이자 플레이메이커로 대활약하였고 각종 대회에서 팀내 최고 득점자는 으레 신진원 선수였다고 한다. [[연세대학교]]로 진학후에는 [[김호곤]] 감독에게 조련을 받았다. 당시 김호곤 감독이 이끌던 1990년대 후반의 연세대는 황금의 라인업을 자랑했는데 수비의 [[장대일]], 미들의 [[서동원2|서동원]], [[서기복]], 그리고 공격의 [[신진원]], [[정상남]] 까지. 당시 연세대학교의 스쿼드는 대학권에서는 상대할 자가 없었고 실업축구 팀과도 박빙일 정도의 실력을 자랑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연세대 베스트 11의 꼭지점이라 할 플레이메이커와 윙포워드 몫은 으레 신진원 선수의 것이었고, 그 비중에 걸맞게 드리블, 득점감각, 패스, 경기운영 어느 방면에서도 최고를 자랑했다고 한다. 다만 스피드가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1997년 대전 시티즌이 창단되면서 그 해 드래프트를 신청한 신진원 선수는 무조건 1순위로 대전에 지명될 것이라 여겨졌고 결국 예상대로였다. [[1997년 드래프트]]에서 신진원 선수를 비롯, [[서동원2|서동원]] 등 연세대 미드필더 졸업 선수들 모두가 대전에 입단하게 된다.
       
=== 대전 시티즌 입단과 신인왕 수상 ===
 
=== 대전 시티즌 입단과 신인왕 수상 ===
[[대전 시티즌]] 입단 첫해, 시즌 초반에는 주로 플레이메이커로 뛰었으나, 경기 템포를 조절하고 볼배급을 하는데 미숙함, 체력 부족등 여러모로 미숙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윙 포워드로 포지션을 변경하고 여름 휴식기에서 지옥같은 체력훈련을 소화한 끝에 스피드와 체력을 한껏 끌어올리면서 한차원 다른 선수로 성장하게 된다. 리그 재개후 3경기 연속골을 비롯해서 후반기에만 6골을 쏟아넣어 97시즌 리그 득점 5위에 랭크된 신진원 선수는 신인왕 후보로 급부상한게 당연했다. 당시 신인왕 경쟁은 다른선수도 아닌 같은 [[대전 시티즌]] 입단 동기인 [[김현민]] 선수와 벌어졌는데, 결과는 '신진원 16표 VS 김현민 15표' 의 아슬아슬한 신진원 선수의 판정승으로 마무리되었다. [[김현민]] 선수는 97시즌 도움 랭크 2위에 라피도 컵대회에서 2골을 기록하는등, 리그 일정 내내 꾸준한 활약을 보였으나, 실업 리그 출신의 [[중고 신인]]이라는 점이 약점으로 작용해 아쉽게 분루를 삼켰다. 여기에 K리그 대상 97년 시즌 베스트 11 미드필더 부문에도 신진원 선수가 포함되면서 대전 시티즌 소속으로 첫번째 시즌 베스트 11 선정자가 되는 기록도 남겼다. 이후 대전 소속의 선수가 베스트 11에 선정된 경우는 2003년 [[이관우]] 선수가 미드필더 부문을 수상한 경우 외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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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시티즌]] 입단 첫해, 시즌 초반에는 주로 플레이메이커로 뛰었으나, 경기 템포를 조절하고 볼배급을 하는데 미숙함, 체력 부족등 여러모로 미숙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윙 포워드로 포지션을 변경하고 여름 휴식기에서 지옥같은 체력훈련을 소화한 끝에 스피드와 체력을 한껏 끌어올리면서 한차원 다른 선수로 성장하게 된다. 리그 재개후 3경기 연속골을 비롯해서 후반기에만 6골을 쏟아넣어 97시즌 리그 득점 5위에 랭크된 신진원 선수는 신인왕 후보로 급부상한게 당연했다. 당시 신인왕 경쟁은 다른 선수도 아닌 같은 [[대전 시티즌]] 입단 동기인 [[김현민]] 선수와 벌어졌는데, 결과는 '신진원 16표 VS 김현민 15표' 의 아슬아슬한 신진원 선수의 판정승으로 마무리되었다. [[김현민]] 선수는 97시즌 도움 랭크 2위에 라피도 컵대회에서 2골을 기록하는등, 리그 일정 내내 꾸준한 활약을 보였으나, 실업 리그 출신의 [[중고 신인]]이라는 점이 약점으로 작용해 아쉽게 분루를 삼켰다. 여기에 K리그 대상 97년 시즌 베스트 11 미드필더 부문에도 신진원 선수가 포함되면서 대전 시티즌 소속으로 첫번째 시즌 베스트 11 선정자가 되는 기록도 남겼다. 이후 대전 소속의 선수가 베스트 11에 선정된 경우는 2003년 [[이관우]] 선수가 미드필더 부문을 수상한 경우 외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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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그리고 대전 ===
 
=== 전남 그리고 대전 ===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 이후 신진원 선수는, 2001시즌 전남에서 주로 조커 역할을 수행하며 감각적인 발리슛으로 결승골을 기록하기도 하는 등, 새팀에 차차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전남 입단 이듬해인 2002년 1월, 교통사고의 휴유증과 무리한 조기 복귀를 위한 재활 감행으로 인한 [[피로 골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더 이상 프로 선수로 뛰기 어렵다는 판정을 받게 된다. 전남은 어떻게든 재활시켜 신 선수를 활용할 방안을 모색했으나, 결국 2001년 시즌 종료와 함께 방출을 결정한다. [[대전 시티즌]]은 전남에서 방출된 신진원 선수를 영입해, 신 선수는 2년만에 친정팀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때가 2003년 1월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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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드래곤즈]]에 입단 이후 신진원 선수는, 2001시즌 전남에서 주로 조커 역할을 수행하며 감각적인 발리슛으로 결승골을 기록하기도 하는 등, 새팀에 차차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전남 입단 이듬해인 2002년, 교통사고의 휴유증과 무리한 조기 복귀를 위한 재활 감행으로 인한 [[피로 골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더 이상 프로 선수로 뛰기 어렵다는 판정을 받게 된다. 전남은 어떻게든 재활시켜 신 선수를 활용할 방안을 모색했으나, 결국 2002시즌 종료와 함께 방출을 결정한다. [[대전 시티즌]]은 전남에서 방출된 신진원 선수를 영입해, 신 선수는 2년만에 친정팀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때가 2003년 1월의 일이었다.  
       
=== 대전에서의 마무리와 은퇴 ===
 
=== 대전에서의 마무리와 은퇴 ===
2003년 [[대전 시티즌]]은 익히 알려진대로 홈승률 65%를 상회하며, 홈관중 점유율 1위, 조밀한 패스축구와 압박 축구로 리그 6위 (18승 11무 15패)에 랭크되며 창단 이후 최고의 성적을 남긴다. 불과 1년전인 2002년, 월드컵 직후 터져나왔던 팀 재정난과 해체설 등의 뒤숭숭한 분위기와 1승 12무 15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겼던 대전의 화려한 변신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대전의 팬이 되었고 또한 감동했다. 그 주역에 신진원 선수의 모습은 없었다. 그러나, 신진원 선수는 [[이관우]] 선수의 로테이션 자원으로 10경기를 교체출장하며 대전 시티즌을 창단 시점부터 짊어져왔던 에이스이자 노장 선수로서의 책임감을 다했다. 그리고 2004년 짧았지만 화려했던 그만큼 고통이 가득 배어있는 8년간의 프로 생활을 마무리한다. 대전측에서 은퇴식 없이 끝낸게 약간 아쉽다. 신 선수 본인도 아쉬워하는 대목<ref>[http://fccheonan.co.kr/news/soccer_news_view.php?idx=213] 신진원 선수 인터뷰중. 참고로 [[서유]]는 2009시즌을 끝으로 K3 선수 생활도 정리하고 대전 스카우터로 부임하게된 신진원 선수의 은퇴식을 거행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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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대전 시티즌]]은 익히 알려진대로 홈승률 65%를 상회하며, 홈관중 점유율 1위, 조밀한 패스축구와 압박 축구로 리그 6위 (18승 11무 15패)에 랭크되며 창단 이후 최고의 성적을 남긴다. 불과 1년전인 2002년, 월드컵 직후 터져나왔던 팀 재정난과 해체설 등의 뒤숭숭한 분위기와 1승 12무 15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겼던 대전의 화려한 변신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대전의 팬이 되었고 또한 감동했다. 그 주역에 신진원 선수의 모습은 없었다. 그러나, 신진원 선수는 [[이관우]] 선수의 로테이션 자원으로 10경기를 교체 출장하며 대전 시티즌을 창단 시점부터 짊어져왔던 에이스이자 노장 선수로서의 책임감을 다했다. 그리고 2004년 짧았지만 화려했던 그만큼 고통이 가득 배어있는 8년간의 프로 생활을 마무리한다. 대전측에서 은퇴식 없이 끝낸게 약간 아쉽다. 신 선수 본인도 아쉬워하는 대목<ref>[http://fccheonan.co.kr/news/soccer_news_view.php?idx=213] 신진원 선수 인터뷰중. 참고로 [[서유]]는 2009시즌을 끝으로 K3 선수 생활도 정리하고 대전 스카우터로 부임하게된 신진원 선수의 은퇴식을 거행했다</ref>
    
정리하자면, 신진원 선수는 팀이 어려운 때에 리더이자 에이스의 역할을 다했고, 팀이 화려하게 비상할 때, 그는 주역은 아니었지만 대전 소속의 선수로서 모든걸 지켜보며 함께 기뻐할 수 있었다. 여기에 대전에서 프로 생활을 마무리 하는 영예도 얻었다. 대전의 역대 에이스<ref>[[김은중]]이나 [[이관우]] , [[데닐손]]등, 물론 이들이 에이스냐는 점에 반론할 사람들도 있을법 하지만..</ref>들이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숙명, 대전을 떠나 다른 팀에서 활약하며 대전의 적으로 뛸 수밖에 없고 대전에 돌아와 은퇴할 가능성도 낮다는 점 등에서 자유로운 신진원 선수는 이론의 여지없는 대전의 레전드라 호칭할 만하다.
 
정리하자면, 신진원 선수는 팀이 어려운 때에 리더이자 에이스의 역할을 다했고, 팀이 화려하게 비상할 때, 그는 주역은 아니었지만 대전 소속의 선수로서 모든걸 지켜보며 함께 기뻐할 수 있었다. 여기에 대전에서 프로 생활을 마무리 하는 영예도 얻었다. 대전의 역대 에이스<ref>[[김은중]]이나 [[이관우]] , [[데닐손]]등, 물론 이들이 에이스냐는 점에 반론할 사람들도 있을법 하지만..</ref>들이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숙명, 대전을 떠나 다른 팀에서 활약하며 대전의 적으로 뛸 수밖에 없고 대전에 돌아와 은퇴할 가능성도 낮다는 점 등에서 자유로운 신진원 선수는 이론의 여지없는 대전의 레전드라 호칭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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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수 은퇴 이후 ===
 
=== 선수 은퇴 이후 ===
은퇴 후 독일 브레멘 유소년에서 코치연수를 받은 뒤, 문일고등학교 코치와 성지고등학교 감독을 거쳐 2008년부터 연세대학교 코치로 활약하였다. [[K3]] [[서유]]에 2009년 등록 선수이자 서유 유소년 총감독으로 재직하였으며, 2010년 서유와 연세대 생활을 정리하고 [[왕선재]] 감독의 부름을 받아 [[대전 시티즌]]의 2군 코치 겸 스카우터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1년 5월, 대전에서 [[승부조작]] 파문으로 4명이 구속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또한 성적부진의 이유로 2011년 7월 왕선재 감독이 경질 당하면서, 2011년 7월 4일부터 대전의 감독대행이 되었다. 그리고 [[포항 스틸러스]]와의 데뷔전에서 7-0의 대패 및 다음 경기였던 [[경남 FC]]와의 경기 1:7 패배등 '''2경기 연속 7실점한 감독''' 이란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기록을 세웠다. 안습.. 결국 신진원 감독대행의 부진으로 [[유상철]] 감독의 선임이 재빠르게 이루어졌고, 이후 대전 시티즌의 코치로 활동하다가 2011시즌 종료 후 [[강원 FC]]의 코치로 부임하였다.<ref>덧붙여 신진원 코치가 강원으로 간 반면, [[최진철]] 前 강원 코치가 대전으로 갔으니 코치 트레이드일지도!?</ref> 그러나 강원에 적응할 새도 없이 2012 시즌 중반 [[김상호]] 감독을 비롯한 강원 FC 코칭 스태프가 일괄 정리 됨에 따라 신진원 코치도 계약해지를 당했고, 이후 [[인천 유나이티드]]의 스카우터로 부임하여 2015년까지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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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독일 브레멘 유소년에서 코치 연수를 받은 뒤, 문일고등학교 코치와 성지고등학교 감독을 거쳐 2008년부터 연세대학교 코치로 활약하였다. [[K3]] [[서유]]에 2009년 등록 선수이자 서유 유소년 총감독으로 재직하였으며, 2010년 서유와 연세대 생활을 정리하고 [[왕선재]] 감독의 부름을 받아 [[대전 시티즌]]의 2군 코치 겸 스카우터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1년 5월, 대전에서 [[승부조작]] 파문으로 4명이 구속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또한 성적부진의 이유로 2011년 7월 왕선재 감독이 경질 당하면서, 2011년 7월 4일부터 대전의 감독대행이 되었다. 그리고 [[포항 스틸러스]]와의 데뷔전에서 7-0의 대패 및 다음 경기였던 [[경남 FC]]와의 경기 1:7 패배등 '''2경기 연속 7실점한 감독''' 이란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기록을 세웠다. 안습.. 결국 신대행의 부진으로 [[유상철]] 감독의 선임은 재빠르게 이루어졌고, 이후 신코치는 유상철 감독을 보좌하다가 2011시즌 종료 후 [[강원 FC]]의 코치로 부임하였다.<ref>덧붙여 신진원 코치가 강원으로 간 반면, [[최진철]] 前 강원 코치가 대전으로 갔으니 코치 트레이드일지도!?</ref> 그러나 강원에 적응할 새도 없이 2012 시즌 중반 [[김상호]] 감독을 비롯한 강원 FC 코칭 스태프가 일괄 정리 됨에 따라 신코치도 계약 해지를 당했고, 이후 [[인천 유나이티드]]의 스카우터로 부임하여 2015년까지 활동하였다. 이후 2016년 [[경기영상과학고]] 축구부 감독을 거쳐 2017년 현재는 [[숭실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활동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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