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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1 바이트 추가됨 ,  2017년 9월 10일 (일)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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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판직을 수행할 당시 대쪽같은 판정으로 이름을 날리셨다. 하지만 당시는 심판의 권위가 제대로 서질 않았던 시기라 잦은 선수들의 항의 및 관계자들의 폭언 및 폭행까지 받아내는등 온갖 고생을 하셨다고.. 압권은 김창룡 당시 특무부대장과의 일화였다. 당시 군축구대회에서 특무대는 모부대를 상대로 5:0 완승을 눈앞에 두고있던 찰나, 경기 종료 5분을 남기고 해가 져버리는 통에 경기는 무효 선언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는 야간조명 시설이 전무하던 시절이라, 해가 지면 자동 게임 종료, 다음날 재경기가 치루어졌다.) 이를 안 김창룡은 노발대발하며, 경기가 벌어지던 장소 바로 옆에 위치했던 군부대에 차량을 모조리 징발했고 차량들을 운동장에 도열, 라이트를 켜게하여 운동장을 밝히고 '이제 조명이 생겼으니 경기를 속개하라'는 엄명(?)을 내렸는데... 하지만 김덕준 주심은 규정상 경기는 무효 선언이 되어야 한다고 버텼고, 김창룡에게 밉보인 당시 그는 김창룡의 부하들에게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다행히 특무대 축구단 선수이자 김덕준 씨의 연세대 후배였던 [[김지성]] 씨가 부랴부랴 나서 구타를 말렸고, 그 틈을 타 김덕준 주심은 담벼락을 넘어 도망을 쳐야만 했다고..
 
* 심판직을 수행할 당시 대쪽같은 판정으로 이름을 날리셨다. 하지만 당시는 심판의 권위가 제대로 서질 않았던 시기라 잦은 선수들의 항의 및 관계자들의 폭언 및 폭행까지 받아내는등 온갖 고생을 하셨다고.. 압권은 김창룡 당시 특무부대장과의 일화였다. 당시 군축구대회에서 특무대는 모부대를 상대로 5:0 완승을 눈앞에 두고있던 찰나, 경기 종료 5분을 남기고 해가 져버리는 통에 경기는 무효 선언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는 야간조명 시설이 전무하던 시절이라, 해가 지면 자동 게임 종료, 다음날 재경기가 치루어졌다.) 이를 안 김창룡은 노발대발하며, 경기가 벌어지던 장소 바로 옆에 위치했던 군부대에 차량을 모조리 징발했고 차량들을 운동장에 도열, 라이트를 켜게하여 운동장을 밝히고 '이제 조명이 생겼으니 경기를 속개하라'는 엄명(?)을 내렸는데... 하지만 김덕준 주심은 규정상 경기는 무효 선언이 되어야 한다고 버텼고, 김창룡에게 밉보인 당시 그는 김창룡의 부하들에게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다행히 특무대 축구단 선수이자 김덕준 씨의 연세대 후배였던 [[김지성]] 씨가 부랴부랴 나서 구타를 말렸고, 그 틈을 타 김덕준 주심은 담벼락을 넘어 도망을 쳐야만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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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라디오 방송국이었던 DBS 동아방송에서 축구 해설을 맡아 인기를 누리기도 하셨다. 한마디로 한국축구 1세대 [[축구 해설가]]였던셈. 이후 2세대 축구 해설가 바통은 심판 후배이기도 한 [[선영제]] 씨에게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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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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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ports-g.com/2017/05/05/%EA%B9%80%ED%98%84%ED%9A%8C-16%EB%85%84-%EB%8F%99%EC%95%88-7%EB%A7%8C-%EB%AA%85-%EA%B9%80%EB%8D%95%EC%A4%80-%EC%84%A0%EC%83%9D%EC%9D%98-%EC%96%B4%EB%A6%B0%EC%9D%B4-%EC%B6%95| 16년간 어린이 위해 산 김덕준 선생의 감동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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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18년생]][[분류:1987년 사망]][[분류:연세대학교의 선수]][[분류:일제강점기의 선수]][[분류:실업축구 지도자]][[분류:심판]][[분류:축구 행정가]][[분류:사망한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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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18년생]][[분류:1987년 사망]][[분류:연세대학교의 선수]][[분류:일제강점기의 선수]][[분류:실업축구 지도자]][[분류:심판]][[분류:축구 행정가]][[분류:축구 해설가]][[분류:사망한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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