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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단축구협의회'''(金融團蹴球協義會)는 [[금융단]]소속 축구팀들의 협의체이자 금융단 축구 대회를 주관하는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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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단축구협의회'''(金融團蹴球協義會)는 [[금융단]] 소속 축구팀들의 협의체이자 각종 금융단 축구 대회를 주관하는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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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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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1969년 4월25일 설립되어, [[금융단 축구리그]] 등 각종 금융단 축구대회를 주관하다가 1970년 [[금융단축구협의회]] 소속 축구팀이 [[한국실업축구연맹]]통합되면서 매년 '''[[대통령배 금융단축구대회]]'''와 '''[[국무총리배 금융단축구대회]]'''를 개최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1976년 2월28일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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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4월 25일 설립되어, [[금융단 축구 리그]] 등 각종 금융단 축구 대회를 주관하다가 1970년 [[금융단축구협의회]] 소속 축구팀이 [[한국실업축구연맹]]통합되면서 매년 '''[[대통령배 금융단축구대회]]'''와 '''[[국무총리배 금융단축구대회]]'''를 개최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1976년 2월 28일 해체되었다.
       
== 역사 ==
 
== 역사 ==
1960년대 후반은 아시아 축구 최강을 자부하던 한국 축구에 있어 충격적인 사실의 연속이었다. 6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월드컵 8강에 진입하고 68년 [[일본]]이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자 국내 축구계에 불어온 충격은 엄청났다. 그리고 북과 일본의 축구 발전에 대항하여 축구를 발전시킬 방안으로 3가지가 시행되었는데 하나는 중앙정보부장 김현욱의 [[양지축구단]]을 창단이고 나머지는 대한축구협회 재무이사 시절 [[장덕진]]이 설립한 '''금융단축구협의회'''와 회장 재임중 시행했던'''[[박스컵]] 국제축구대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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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 이전까지 아시아 최강을 자부하던 한국 축구는 충격적인 사실에 직면하고 있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월드컵 8강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고, [[1968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일본]]이 동메달을 획득하고, 가마모토 쿠니시게가 올림픽 득점왕을 차지하는등 국제 무대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는 반면, 한국 축구는 아시아 예선조차 통과하지 못했기에 그로 인한 자존심 상처가 엄청났던 것.<ref>여담으로 1966년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한국은 66년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는, 68년 올림픽에 아마추어 규정에 따라 참가할 수 없다는 FIFA의 유권 해석에 반발해 기권하였고 (참고 기사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04050020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04-05&officeId=00020&pageNo=4&printNo=13369&publishType=00020]) 이처럼 월드컵 불참까지 불사해가며 참가한 1968년 올림픽은 일본에 밀려 아시아예선에서 탈락했다.</ref> 이에 북한과 일본의 축구 발전에 대항해 한국 축구를 발전시킬 방안으로 3가지가 시행되었는데, 하나는 중앙정보부장 김현욱의 [[양지축구단]]을 창단이었고 나머지는 대한축구협회 재무이사 시절 [[장덕진]]이 설립한 '''금융단축구협의회'''와 회장 재임중 시행된'''[[박스컵]] 국제축구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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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금융단 축구팀의 창단으로 설립된 금융단축구협의회는 2013년 현재 당시 창단된 금융단 소속 축구팀이 모두 해체되어 드러나는 성과가 없어 보이지만 당시 축구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변변한 실업 축구팀도 몇개 없어 축구인들은 운동보다 먹고 살기에 급급했을 만큼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선수들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여야 축구발전과 전력 강화가 있을 수 있기에 실업팀의 증가를 고민하던 당시 축협의 구세주는 축협 재무이사인 [[장덕진]]이었다. 68년 멕시코 월드컵 이후 그는 재무부 이재국장<ref>2014년 현재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의 지위.</ref>이자 대통령 [[박정희]]의 처조카 사위라는 막강한 파워를 이용하여 금융단 소속 12개 국책은행과 시중은행들에게 축구단 창단을 요청하였다. 당시 이재국장이 얼마나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냐면 은행, 보험, 증권, 금고 등 1500여개 모든 금융기관의 인사와 경영에 관한 주요결정의 책임자이자 금융기관의 대출한도와 대출금리를 정하며 대기업에 대한 여신관리도 책임지는 자리였다. 은행장들은 이재국장이 호출하면 언제든지 즉각 달려와야 했을 정도였으며, 은행장들도 이재국장을 한번이라도 만나기 위해서 동분서주 하는 위치였다. 한마디로 은행들의 행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요청이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루시퍼였다. 요청 이 후 설립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져서 그 전초전으로 1968년 10월 제1회 금융인체육대회<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8102200209208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8-10-22&officeId=00020&pageNo=8&printNo=14471&publishType=00020 일은 상은 공동우승] -1968년 10월 22일, [[동아일보]]-</ref>를 개최하였으며, 이듬해 1월 [[상업은행 축구단]]의 창단을 시작으로 3월 주택은행, 조흥은행, 제일은행, 외환은행, 산업은행, 신탁은행의 창단과 함께 금융단축구협의회를 결성하고 실업축구와는 독자적인 금융단 축구리그를 시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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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금융단 축구팀의 창단으로 설립된 금융단축구협의회는 1970년대 축구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는 변변한 실업 축구팀이 없어 축구인들이 운동으로 먹고 살려면 군인이 되는 길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던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선수들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여야 축구 발전과 전력 강화가 가능하다는건 모두가 공감하는바였지만, 돈먹는 하마 취급을 받을게 뻔한 실업팀의 창단을 바라기는 언감생심이었는데.. 이때 구세주로 등장한 것이 축협 재무이사인 [[장덕진]] 씨였다. 68년 멕시코 월드컵 이후 그는 재무부 이재국장<ref>2014년 현재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의 지위.</ref>이자 대통령 [[박정희]]의 처조카 사위라는 막강한 파워를 이용하여 금융단 소속 12개 국책은행과 시중은행들에게 축구단 창단을 요청하였다. 당시 이재국장이 얼마나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냐면 은행, 보험, 증권, 금고 등 1500여개 모든 금융기관의 인사와 경영에 관한 주요 결정의 책임자이자 금융기관의 대출 한도와 대출 금리를 정하며, 대기업에 대한 여신관리도 책임지는 자리였다. 때문에 은행장들은 이재국장이 호출하면 언제든지 즉각 달려와야 했으며, 은행장들도 이재국장을 한번이라도 만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상황이었을 정도.. 한마디로 은행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자리가 이재국장 자리였다. 이런 사람의 요청이니 은행 축구팀의 설립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전초전으로 1968년 10월 제1회 금융인체육대회<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8102200209208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8-10-22&officeId=00020&pageNo=8&printNo=14471&publishType=00020 일은 상은 공동우승] -1968년 10월 22일, [[동아일보]]-</ref>를 개최하였으며, 이듬해 1월 [[상업은행 축구단]]의 창단을 시작으로 3월 주택은행, 조흥은행, 제일은행, 외환은행, 산업은행, 신탁은행의 창단과 함께 금융단축구협의회를 결성하고 실업축구와는 독자적인 금융단 축구리그를 시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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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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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 [[장덕진]]
 
* [[장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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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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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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