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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택''' (1938년 7월 5일<ref>월간축구 1973년 4월호 기준</ref> ~ 2007년 2월 5일) 은 전직 축구선수이자 축구인이다.


== 선수 시절 ==
서울 출신으로 낙양중<ref>현 중앙대부속중학교. 낙양중학교에서 1965년 중대부중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ref> [[한양공고]], [[한양대학교]]를 졸업하였다. 한양대 졸업 후 [[서울시경]]에서 1년간 활동하였으며 팀이 해체되자 [[대한중석]]으로 자리를 옮겨 1968년까지 선수 생활 후 은퇴하였다. 선수 시절 포지션은 [[포워드]]였으나 이 자리에 [[최정민]], [[우상권]], [[문정식]], [[손명섭]] 등 쟁쟁한 선배 선수들이 많았던 탓에 국가대표에는 한번도 발탁되지 못하였다. 그나마 [[1961년 AFC U-19 챔피언십]] 대회에 참가하여 청소년대표 경력은 있지만, 하필 이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은 조별 예선 1승 3무를 거두며 결승전에도 못올라가고 4위에 그쳐<ref>직전 대회들에서 2회 연속 우승을 거두었던 한국 청소년대표팀의 위상이 깍였다며 4위라는 성적을 치욕스러워했었다.</ref>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한마디로 선수 시절 그렇게 쟁쟁한 기록은 없었던 셈.


== 지도자 생활 ==
30살의 나이로 일찌감치 선수 생활을 정리한 최은택 씨는, 은퇴 후 [[한양대학교]] 축구부 코치로 선임되어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1970년대 초반 [[AFC]]와 [[대한축구협회]]가 추진한 FIFA 코칭 스쿨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데트마르 크라머]] 씨의 강습을 받으며 '학구파 지도자'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고 이후로 [[1973년 AFC U-19 챔피언십]]에 참가하는 대한민국 청소년대표팀 [[트레이너]]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국가대표 지도자의 길을 걷기에 이른다.


== 포항제철 감독 부임 ==
[[한양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던 최은택 씨는 1985년 시즌을 앞두고, [[포항제철 아톰즈]]의 사령탑으로 부임하면서 세간을 놀라게 하였다. 대학교수 직을 버리고 프로축구팀 감독으로 간 것도 놀라웠지만, 향간에 계약금만 1억원을 받았다는 얘기가 퍼지면서 관심은 더욱 증폭되었다고.. 이후 최은택 씨는 [[월간축구]]와의 인터뷰에서 [[박태준]] 회장과 [[한홍기]] 전 포철 감독과 [[대한중석]] 시절부터 인연이 있어 청을 거절하기 어려웠고, 2년간만 포항제철 감독직을 수행 후 다시 한양대학교로 돌아가겠다는 약조를 받은 뒤 감독직을 수락한 것이라 설명하며 논란을 정리했던바 있다.


== 참고 ==
<references/>

[[분류:1938년생]][[분류:2007년 사망]][[분류:한양공고의 선수]][[분류:한양대학교의 선수]][[분류:실업축구 선수]][[분류:학원축구 지도자]][[분류: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지도자]][[분류:포항 스틸러스의 지도자]][[분류:해외진출 지도자]][[분류:사망한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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