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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10~11월 [[명치신궁경기대회]] ==
== 1935년 10~11월 [[명치신궁경기대회]] ==
[[file:1935명치신궁.jpg|섬네일|220px|명치신궁경기대회 우승 후 기념 촬용하는 조선대표팀]]
[[file:1935명치신궁.jpg|섬네일|250px|명치신궁경기대회 우승 후 기념 촬영한 조선대표팀]]
전경성축구단은, 1차전에서 중국 선발<ref>臥虎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 일제 통치하에 놓여있던 타이완에서 파견된 축구 선발팀이 아닐까 싶다.</ref>을 6:2로 누른 뒤 2차전에서 북해도 하코다테 팀과 일전을 치렀다.<ref>[[월간축구]] 1971년 9월호, [[이유형]] 씨와의 인터뷰에서는 하코다테와의 경기가 전일본축구선수권 1차전인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아마도 기억에 혼선이 있으셨던듯. 반면 월간축구 1973년 4월호에 실린 김성간 씨의 인터뷰에는 하코다테와의 경기가 명치신궁대회 2차전이었던 점과 스코어까지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또한 김씨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경기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당시 일본육사 조선인 생도였던 채병덕, 이종찬, 이용문 등이 응원을 왔었다고 한다.</ref> 1차전과 달리 2차전은 상당히 고전하였는데, 당시 0:1 리드를 내준 뒤 전경성 선수들이 지나치게 서두르는 플레이를 보였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는 후반전에도 이어졌는데, 설상가상이라고 상대팀에 [[PK]] 까지 내주는 실수를 저지른다. 다들 '이제 졌구나' 하고 낙담하려던 찰나, 하코다테 선수가 PK를 실축<ref>하코다테 선수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볼을 찬게 아니라 땅을 긁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힘이 안실린 볼은 데굴데굴 굴러가 골키퍼 품에 안겼다고.</ref> 하며 분위기가 역전되었고 결국 [[김영근 (1908년)|김영근]], [[김성간]] 선수의 연속골로 2차전마저 승리로 장식한다. 이후 완전히 몸이 풀린 전경성축구단은 준결승전에서 일본 간사이대학(関西大学)를 6:0, 결승전에서 일본 게이오대학(慶應義塾大学)을 2:0으로 연파하며 전일본선수권에 이어 2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전경성축구단은, 1차전에서 중국 선발<ref>臥虎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 일제 통치하에 놓여있던 타이완에서 파견된 축구 선발팀이 아닐까 싶다.</ref>을 6:2로 누른 뒤 2차전에서 북해도 하코다테 팀과 일전을 치렀다.<ref>[[월간축구]] 1971년 9월호, [[이유형]] 씨와의 인터뷰에서는 하코다테와의 경기가 전일본축구선수권 1차전인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아마도 기억에 혼선이 있으셨던듯. 반면 월간축구 1973년 4월호에 실린 김성간 씨의 인터뷰에는 하코다테와의 경기가 명치신궁대회 2차전이었던 점과 스코어까지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또한 김씨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경기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당시 일본육사 조선인 생도였던 채병덕, 이종찬, 이용문 등이 응원을 왔었다고 한다.</ref> 1차전과 달리 2차전은 상당히 고전하였는데, 당시 0:1 리드를 내준 뒤 전경성 선수들이 지나치게 서두르는 플레이를 보였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는 후반전에도 이어졌는데, 설상가상이라고 상대팀에 [[PK]] 까지 내주는 실수를 저지른다. 다들 '이제 졌구나' 하고 낙담하려던 찰나, 하코다테 선수가 PK를 실축<ref>하코다테 선수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볼을 찬게 아니라 땅을 긁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힘이 안실린 볼은 데굴데굴 굴러가 골키퍼 품에 안겼다고.</ref> 하며 분위기가 역전되었고 결국 [[김영근 (1908년)|김영근]], [[김성간]] 선수의 연속골로 2차전마저 승리로 장식한다. 이후 완전히 몸이 풀린 전경성축구단은 준결승전에서 일본 간사이대학(関西大学)를 6:0, 결승전에서 일본 게이오대학(慶應義塾大学)을 2:0으로 연파하며 전일본선수권에 이어 2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