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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양회'''(雙龍洋灰)는 1962년 5월에 설립한 시멘트 제조회사로서 현재 대한민국 최대의 시멘트,콘트리트 제조회사이다.  1967년 [[동해]]에 쌍용양회 시멘트공장 건설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금성방직을 매각하면서 '''금성방직 축구단'''은 '''쌍용양회 축구단'''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하였는데 1년여 운영하다 1968년 해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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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1962년 5월에 설립한 시멘트 제조회사로서 현재 대한민국 최대의 시멘트,콘트리트 제조회사이다.  1967년 [[동해]]에 쌍용양회 시멘트공장 건설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금성방직을 매각하면서 '''금성방직 축구단'''은 '''쌍용양회 축구단'''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하였는데 1년여 운영하다 1968년 해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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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방직 ==
 
== 금성방직 ==
'''(주)금성방직'''은 1948년 10월 쌍용그룹 김성곤회장이 안양에 설립한 직물방직 회사이다. 금성방직의 설비는 본래 일제시대 조선직물(부산에 있었던 [[조선방직]]과는 다른 기업이다.)사의 것을 들여왔으나 6.25 사변 당시 모두 소실되어, 전후 UN 한국부흥위원단의 원조를 받아 안양에 재건하였다.<ref>[http://www.aynews.co.kr/default/index_view_page.php?board_data=aWR4JTNENDA4MTIlMjZzdGFydFBhZ2UlM0QyMCUyNmxpc3RObyUzRDI1MCUyNnRvdGFsTGlzdCUzRDI4OQ==||&search_items=cGFydF9pZHglM0QxNDIlMjZ2aWV3X2NudCUzRCUyNmdyb3VwX2lkJTNEJTI2dmlld19wYWdlJTNE|| 지역경제 움직였던 ‘금성방직’을 아시나요? 50~60년대 안양 경제계 움직인 거대공장] 안양시민신문, 2010-05-1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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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금성방직'''은 1948년 10월 김성곤이 안양에 설립한 직물방직 회사이다. 금성방직의 설비는 본래 일제시대 조선직물(부산에 있었던 [[조선방직]]과는 다른 기업이다.)사의 것을 들여왔으나 6.25 사변 당시 모두 소실되어, 전후 UN 한국부흥위원단의 원조를 받아 안양에 재건하였다.<ref>[http://www.aynews.co.kr/default/index_view_page.php?board_data=aWR4JTNENDA4MTIlMjZzdGFydFBhZ2UlM0QyMCUyNmxpc3RObyUzRDI1MCUyNnRvdGFsTGlzdCUzRDI4OQ==||&search_items=cGFydF9pZHglM0QxNDIlMjZ2aWV3X2NudCUzRCUyNmdyb3VwX2lkJTNEJTI2dmlld19wYWdlJTNE|| 지역경제 움직였던 ‘금성방직’을 아시나요? 50~60년대 안양 경제계 움직인 거대공장] 안양시민신문, 2010-05-10</ref> 금성방직을 소유했던 김성곤은 금성재벌로 불리울 정도로 당시 유력한 재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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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주)쌍용양회공업을 설립하고, 1967년 동해군(현, 동해시)에 쌍용양회시멘트공장 건립 자금 조달을 위해 금성방직을 태평방직과 함께 대한농산에 매각한 후, 1972년 태평방직과 합병되어 금성방직이란 이름은 사라졌으며 73년 주식회사 대농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양에 위치했던 구, 금성방직 공장도 청주로 이전하고 공장터는 매각되어 주택단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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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주)쌍용양회공업을 설립하고, 1967년 동해군에 쌍용양회시멘트공장 건립 자금 조달을 위해 금성방직을 태평방직과 함께 대한농산에 매각한 후, 1972년 태평방직과 합병되어 금성방직이란 명칭은 사라졌으며 73년 주식회사 대농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양에 위치했던 구, 금성방직 공장도 청주로 이전하고 공장터는 매각되어 주택단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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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곤은 금성방직의 매각으로 금성재벌이라는 이름보다는 쌍용이라는 이름을 주력으로 사용하게 되고 이후 [[쌍용그룹]]이 되었다.  
    
== 금성방직 축구단 ==
 
== 금성방직 축구단 ==
금성방직이 축구계에 남긴 족적은 뚜렷하다. 금성방직은 축구단 창단 이전부터 1960년대 전국에 3곳밖에 없었던 천연잔디구장을 갖춘 곳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1963년 1월 1일 '''금성방직 축구단'''을 창단해 1960년대 국가대표를 다수 배출하며 [[제일모직]], [[대한중석]]과 함께 1960년대 실업 축구를 대표하는 축구단으로 이름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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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방직이 축구계에 남긴 족적은 뚜렷하다. 금성방직은 축구단 창단 이전부터 1960년대 전국에 3곳밖에 없었던 천연잔디구장을 갖춘 곳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김용식]]이 회사의 감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참단 축구단]]이 김용식에게 축구를 배우러 오기도 했다. 1963년 1월 1일 '''금성방직 축구단'''을 창단해 1960년대 국가대표를 다수 배출하며 [[제일모직]], [[대한중석]]과 함께 1960년대 실업 축구를 대표하는 축구단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1967년 금성방직이 매각됨에 따라 금성방직 축구단은 '''쌍용양회 축구단'''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1968년 실업대회에 참가하였으나, 잔디구장과 숙소 등 축구적 환경이 충실하였던 안양에 비해 동해의 축구 환경은 보잘것 없었고, 성적도 급락. 결국 해체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967년 금성방직이 매각됨에 따라 금성방직 축구단은 '''쌍용양회 축구단'''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1968년 실업대회에 참가하였으나, 잔디구장과 숙소 등 축구적 환경이 충실하였던 안양에 비해 동해의 축구 환경은 보잘것 없었고, 성적도 급락. 결국 해체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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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승 경력 ==
 
== 우승 경력 ==
   
1964년 춘계, 추계 [[실업축구연맹전]] 석권, [[전국체전]] 축구 일반부 남자 우승.
 
1964년 춘계, 추계 [[실업축구연맹전]] 석권, [[전국체전]] 축구 일반부 남자 우승.
   
1965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
 
1965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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