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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jpg|섬네일|500픽셀|제 1회 대회 당시 광고]]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는 1971년 제 1회 대회를 시작으로 1999년 제 23회 대회로 마무리될 때 까지 [[대한축구협회]]가 개최한 국제축구대회이다.

초기에는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로 불리우다, 1980년부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로 마지막에는 '''코리아컵 축구대회'''로 명칭이 변경되는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정싱명칭보다는 '''박스컵'''이라는 말이 더 귀에 익을듯.

== 역사 ==
1970년,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었던 [[장덕진]] 씨가 제 6회 [[아시안게임]] 축구 금메달 축하연에서 '''아시아규모의 국제축구대회를 한국에서 해마다 개최하겠다'''고 천명하면서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구상된 것이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의 시작이었다. 장덕진 씨는 당시 재무부차관보라는 지위와 더불어 육영수 여사의 가까운 친인척이라는 인맥을 동원해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개최를 추진하였으며, 박 대통령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전용 우승컵을 하사(?)하면서 직간접적으로 대회 개최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1년 대회부터 1975년 대회까지는 아시아 국가에 한정된 대회였으나 1975년 방한한 당시 [[FIFA]] 회장인 [[주앙 아벨란제]]의 주선으로 브라질 주리그 대표들도 방한하여 동대회에 참가함에 따라 국제 규모(?)의 축구대회로 발전하였다.

1971년 5월 2일부터 15일까지 서울에서 제 1회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가 개막한 이래로 1989년까지 매년 대회가 개최되었다. (1986년 제외) 1991년부터는 2년 주기로 대회가 치루어지다 1999년 코리아컵 대회를 끝으로 폐지되었다. 폐지 이유는 만성적 적자. 1981년 대회 등 몇몇 대회를 제외하고는 항상 적자였다.

== 역대 대회 결과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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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횟수!!연도!!대회 명칭!!우승국!!결승전<br>스코어!!준우승국!!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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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1971||rowspan=5|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대한민국 축구국가대표팀|대한민국]]''', '''[[버마]]''' 공동 우승|| 0:0 || || 첫번째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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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1972||'''버마''' || || 인도네시아 || 대한민국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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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1973||'''버마''', '''[[크메르]]''' 공동 우승|| 0:0 || || 대한민국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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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1974||'''대한민국'''||7:1 || 인도네시아 [[PSMS 메단]]<ref>한국을 제외하고 모든 참가국들이 2진급 대표를 보내거나 국가대표가 아닌 시대표를 보냈다. 인도네시아 PSMS팀은 메단시 대표였다. -_-; 이와 같은 초청팀의 빈약함에 대해 당시부터 말이 많았는데 이는 한국팀을 어떻게든 박스컵 우승하게 만들려는 축구협회측의 꼼수였다는게 중론이다.</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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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1975||'''대한민국'''|| 1:0 ||버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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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1976||rowspan=4|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대한민국 [[화랑대표팀]]''', <br>'''브라질'''<ref>이 대회부터 브라질, 뉴질랜드 팀이 참가하면서 아시아를 넘어 대륙간 컵대회로 발전하였다. 당시는 브라질 국가대표팀이라고 소개되었으나 당연히 그럴리 없었고, 상파울루주 21세이하 대표팀이었다.</ref> 공동우승 || 1:0 || ||[[충무대표팀]] 3위<ref>이 대회는 국가대표팀 2진이었던 [[충무대표팀]]도 박스컵에 참가하였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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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ref>이 대회에는 처음으로 영국팀도 참가하였는데 [[미들섹스 원더러스]]라는 선교 목적의 아마축구팀이었다. 이 대회에 참가해 화랑팀에 6:1로 발리는등, 1승 3패의 초라한 성적을 기록해, 진짜 영국팀 맞냐는 핀잔을 들었다.</ref>||1977||'''브라질''' || 1:0 || 대한민국 화랑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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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ref>이 대회에는 미국 올림픽대표 2진, 미국 프로팀인 워싱턴 디플로메츠, 서독, 모로코, 이란, 브라질 상파울루 주리그 대표등, 바레인, 뉴질랜드 등 각 대륙 대표팀이 모두 참가한 명실상부한(?) 세계축구대회로 치루어졌다.</ref>||1978||'''대한민국 화랑대표팀'''|| 6:2 ||워싱턴 디플로메츠|| 충무대표팀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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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ref>올림픽 예선을 앞두고 전력 노출을 꺼린 아시아 국가들이 참가를 거부함에 따라 스리랑카, 수단, 방글라데시 등 수준 떨어지는 팀들만 참가해 결승전을 제외하고는 제대로된 경기가 없었다고 혹평을 들었다. 급기야 동대회를 국고보조했던 문교부측은 2억이나 보조해줬는데도 그따위 저질팀만 초청해왔느냐고 대학축구협회와 대한체육회 관련 인사들을 문책했다.</ref>||1979||'''브라질 비토리아 FC''' || 2:1 || 대한민국 화랑대표팀||충무대표팀 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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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ref>점입가경이라고 1979년보다 더 수준떨어지는 팀초청으로 빈축을 샀다. 당초 튀니지, 이란, 일본등의 참가가 예정되었으나 모두 불참 통보를 해옴에 따라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바레인만이 참가했던것.</ref>||1980||rowspan=5|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대한민국 화랑대표팀'''|| 2:0 || 인도네시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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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ref>전두환의 3S 정책의 일환이었는지는, 이 대회는 '''8억'''이나 국고보조를 타내서 초청팀들의 수준을 한껏 올리는데 성공했다. 이 대회는 우루과이의 [[다누비오 FC]], 아르헨티나의 라싱 코르도바, 프랑스 2부의 샤토루 FC, 서독 [[자르브뤼켄 FC]], 브라질 비토리아 FC 등 총 11개팀이 참가해 역대 대회중 가장 화려한 대회로 꼽힌다. 재밌는건 이 대회에서 다누비오 FC 감독은 출사표를 던지며 ''라싱 코르도바? 그건 뭐하는 듣보잡 지방팀? 우승은 우리꺼 ㅋㅋ''라고 디스했으나 라싱과는 붙지도 못하고 화랑한테 준결승에서 털려서 탈락했다.</ref>||1981||'''대한민국 화랑대표팀''',<br> '''라싱 코르도바''' 공동 우승|| 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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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 대회 설명 ==
<references/>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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