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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방만한 운영구조는 양 공장에 모두 부담이 되었고 특히 사장이 직접 경영하는 부산공장에 비해 상무이사가 경영하는 대구공장의 운영은 더욱 심각했다. 대구공장은 한국전쟁 당시 별다른 전화를 입진 않았으나 재생설비와 전쟁시 소개되었던 설비 등을 모아 운영해 설비효율성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구공장의 경영을 책임지던 상무이사는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결국 방만한 운영구조는 양 공장에 모두 부담이 되었고 특히 사장이 직접 경영하는 부산공장에 비해 상무이사가 경영하는 대구공장의 운영은 더욱 심각했다. 대구공장은 한국전쟁 당시 별다른 전화를 입진 않았으나 재생설비와 전쟁시 소개되었던 설비 등을 모아 운영해 설비효율성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구공장의 경영을 책임지던 상무이사는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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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55년 2월 대구공장이 따로 분리되었으며, 5월 대한방직에 임대되었다가 8월 7억환에 대한방직 사장이자 자유당의 재정부장이었던 설경동에게 불하되어 '''대한방직 대구공장'''이 되었다. 대한방직 대구공장은 1997년 폐쇄되었으며, 공장터를 개발하여 현재 침산 프루지오 1차 아파트와 메가박스 대구점과 [[이마트]] 칠성점이 입주해 있는 쇼핑몰 스펙트럼시티를 건설했다. 스펙트럼 시티에 있는 대한방직 대구사무소에서 현재 땅장사, 분양장사중이나 분양률은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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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55년 2월 대구공장이 따로 분리되었으며, 5월 대한방직에 임대되었다가 8월 7억환에 대한방직 사장이자 자유당의 재정부장이었던 설경동에게 불하되어 '''대한방직 대구공장'''이 되었다. 대한방직 대구공장은 1997년 폐쇄되었으며, 2002년 공장터를 개발하여 현재 침산 푸르지오 1차 아파트와 메가박스 대구점과 [[이마트]] 칠성점이 입주해 있는 쇼핑몰 스펙트럼시티를 건설했다. 스펙트럼 시티에 있는 대한방직 대구사무소에서 아직도 분양장사중.  
    
== 조선방직 축구단 ==
 
== 조선방직 축구단 ==
'''조선방직 축구단'''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흩어졌던 축구인들을 규합하고,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선발전을 겸한 1951년 제 5회 [[전국 축구선수권대회]] 참가를 위해 조직하였던 실업 축구단이다. 조선방직, 혹은 조방으로 줄여서 불리기도 하였다. [[1948년 런던 올림픽대표]]였던 [[박대종]] 씨를 중심으로, 옥정빈, 차순옥, 이철, [[최정민]], 박일갑 씨 등 전쟁 중 이북에서 남하한 축구 선수들이 대거 참가하여 팀을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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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방직 축구단'''은 1951년 강일매에 의해 창단된 실업 축구단이다. 조선방직, 혹은 조방으로 줄여서 불리웠다.<ref>[[1948년 런던 올림픽대표]]였던 [[보성전문]]출신의 [[김규환]]이 창단 이전인 1950년 홍콩원정단 대표로 뽑힐 때 조선방직 소속이었으나 그때는 아마추어 선수의 직장일 뿐이었다.</ref> 1950년 한국전쟁이 발생한 이후 여기저기로 흩어졌던 축구인들을 규합하고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이 당시 축구인들의 염원이었는데 강일매의 결단으로 1951년 창단되었다.<ref>이 때의 공로로 강일매는 [[축협]] 12대 집행부의 부회장이 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이승만의 위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누린 정치깡패 수준의 평가를 받고 있는 강일매이나 축구 원로들 사이에서는 계속 축구판이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존재였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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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초반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를 비롯, 각종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다투었던 기록이 남아있다. 1955년 제 10회 [[전국 축구선수권대회]] 참가를 끝으로 조선방직 축구단의 대회 참가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1955년을 전후하여 해체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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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전에는 대전방직에서 근무하던 [[1948년 런던 올림픽대표]]출신의 [[박대종]]을 중심으로, 옥정빈, 차순옥, 이철, [[최정민]], 박일갑 등 전쟁 중 이북에서 남하한 축구 선수들이 대거 참가하여 팀을 구성하여, 조선방직 대구공장(대구방직)팀으로 제 5회 [[전국 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 우승을 차지하였다. 당시 조선방직은 조선방직 대구공장팀과 본사의 조선방직팀 2팀 모두 출전하였는데, 2팀 모두 4강에 진출했었다. 부산의 조선방직팀은 4강에서 공군팀에게 0 대 2로 패했으며, 결승전에서 대구조방팀이 공군을 1 대 0으로 이기면서 우승을 차지했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101000329209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10-10&officeId=00032&pageNo=9&printNo=11087&publishType=00020 30년전의 경향신문 1951년 10월 11~17일] -1981년 10월 10일, [[경향신문]]-</ref> 이 경기 이후 조선방직팀은 이전 대구조방팀과 1~2명외에는 선수구성이 상동하므로 대구조방팀이 부산의 조선방직팀을 제치고 조선방직의 대표팀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외 대구공장은 바로 옆 블록에 [[대구시민운동장]]이 위치해 있으며, 대구공장 경영 책임자가 손기정이었으므로 이러한 부분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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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이후에는 조선방직팀으로 1950년대 초중반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를 비롯, 각종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다투었으나, 1955년 조선방직 대구공장이 설경동에게 불하되고 대구 대한방직 파업 등의 혼란기를 거치며, 해체된 것으로 여겨진다.<ref>설경동이 공장을 인수 한 이후 대구공장에 근무하던 2600명을 월급 1달치를 지급하면서 해고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재고용하였으며, 남은 900명의 직원들은 고강도의 노동에 시달렸으므로 처우개선과 복직을 요구하는 대구 대한방직 쟁의가 일어났다. 이에 관한 파업과 소송은 1960년 4.19이후에나 해결되었으므로 축구할 형편은 아니었다.</ref> 1956년 도시대항 축구대회에서는 조선방직팀이 [[안성]]대표로 출전을 하거나, [[연세대]]와의 친선경기를 펼치기도 했지만 [[전국선수권대회]]의 출장은 1955년이 마지막이었다.
    
=== 주요 선수 ===
 
=== 주요 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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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승 기록 ===
 
=== 우승 기록 ===
* [[전국 축구선수권대회]] 우승 : 1951년<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101000329209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10-10&officeId=00032&pageNo=9&printNo=11087&publishType=0002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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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 축구선수권대회]] 우승 : 1951년(대구방직)<ref>1951년대회는 조선방직팀과 대구방직팀이 별도로 출전했으므로 이 해 우승팀은 조선방직이 아니라 대구방직으로 표기</ref>
 
*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준우승 : 1952년, 1953년, 1954년
 
*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준우승 : 1952년, 1953년, 1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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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피소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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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경기도중 조선방직이 승리하자 열받은 김창룡이 조선방직 책임자를 끌고 갔는데 그 사람이 손기정이었다.'''라는 에피소드는 사실인데 당시의 기사는 없고 이후 추억하는 내용만 있어 정확한 팩트를 알기 어려우나 아래 두 기사를 비교해 보자. 1951년도에는 특무대가 금방 창단해 4강에도 간적이 없으므로 무리수. 1953년도에는 병참단이 우승을 차지해 무산되지 않았으므로, 무산된 대회인 1952년의 얘기라고 추정. 두 기사를 읽고 판단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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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대구방적팀이 우승을 차지하자 [[특무대]] 김창룡의 심사가 뒤틀렸다. 그래서 부하를 시켜 대구방적 책임자를 끌고 왔는데 다름아닌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었다. 뒤늦게 그를 알아본 군인들이 사과를 하며 끝났지만 손기정이 아니었다면 ㅎㄷㄷ.<ref>[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weekly/2004/11/10/200411100500035/200411100500035_1.html 특무대에 잡혀간 손기정外] -신동아, 2002년 1월 31일 (320호)-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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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대구에서 열린 [[전국축구선수권대회]] [[CIC]]와 조방의 준결승전에서 제비뽑기로 조방이 승리하자 열받은 김창룡이 지프차를 타고 운동장으로 들어가 조방응원단 모조리 잡아들이라고 호통치자 공포를 쏘면서 운동장이 순간 아수라장으로 돌변, 축협간부들은 숨고, 주심 배종호는 진해로 도망가서 대회 자체가 무산되고, 손기정은 특무대에 잡혀갔다가 특무대 코치 [[민병대]]의 주선으로 풀려나고 이 때의 인연으로 CIC육상부를 창설했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022700329206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02-27&officeId=00032&pageNo=6&printNo=9359&publishType=00020 진기록 진경기 (12) "패배는 곧 죽음"] -경향신문, 1976년 2월 27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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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 참고 ==
 
<references/>
 
<references/>
^ [http://www.kabh.or.kr/data/43.pdf 한국경영사학회 회보 <經營史學> 통권 43호 -1950년대 귀속 면방직공장의 노동분쟁에 관한 비교연구(서문석)-] pdf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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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kabh.or.kr/data/43.pdf 한국경영사학회 회보 <經營史學> 통권 43호 -1950년대 귀속 면방직공장의 노동분쟁에 관한 비교연구(서문석)-] pdf 파일
    
[[분류:기업]]
 
[[분류:기업]]
 
[[분류:해체된 축구단]]
 
[[분류:해체된 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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