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대학축구정기전
한일대학축구정기전이란 1972년부터 1991년까지 한일대학축구간의 교류를 위해 개최된 대학축구대회를 말한다. 보통 한일정기전과 세트로 치러지곤 했으며, 한일대학축구정기전은 한일정기전의 오픈 게임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여러모로 덴소컵의 전신이라 할만할듯.
역사[편집]
본래 한일대학축구간 교류전은 한일대학축구정기전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특히 고려대학교와 와세다대학교 축구부간 정기전의 경우는 1961년부터 주기적으로 개최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하지만 한국대학선발과 일본대학선발간 정식 경기는 없던차에 1970년부터 대한축구협회가 한국과 일본 간 국가대표 및 대학선발 정기교류전 개최를 구상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의 초기 반응은 시쿤둥하였으나, 1972년 뮌헨 올림픽 아시아예선에서 한국, 일본 모두 탈락한 후 대한축구협회 뿐만 아니라 일본축구협회도 위기감을 느끼면서 1972년부터 한일정기전 및 한일대학축구정기전이 개최되기에 이른다.
역대 결과[편집]
회 | 연도 | 월일 | 장소 | 홈 | 스코어 | 어웨이 | 비고 |
---|---|---|---|---|---|---|---|
1회 | 1972년 | 9월 14일 | 도쿄국립경기장 | 일본대학선발팀 | 1 대 1 | 한국대학선발팀 | |
2회 | 1973년 | 6월 24일 | 서울운동장 | 한국 | 1 대 0 | 일본 | 심용욱 결승골 |
3회 | 1974년 | 9월 28일 | 도쿄국립경기장 | 일본 | 1 대 4 | 한국 | 신현호(해트트릭), 이영운 골[1] |
4회 | 1975년 | 9월 8일 | 서울운동장 | 한국 | 2 대 2 | 일본 | |
5회 | 1976년 | 12월 4일 | 도쿄국립경기장 | 일본 | 0 대 1 | 한국 | 이강민 결승골 |
6회 | 1977년 | 6월 15일 | 서울운동장 | 한국 | 0 대 1 | 일본 | 득점 : 나카무라('43) |
7회 | 1979년 | 3월 4일 | 도쿄국립경기장 | 일본 | 1 대 1 | 한국 | 최경식 동점골 |
8회 | 1979년 | 6월 16일 | 서울운동장 | 한국 | 2 대 0 | 일본 | |
9회 | 1981년 | 3월 8일 | 도쿄국립경기장 | 일본 | 0 대 0 | 한국 | |
10회 | 1982년 | 3월 21일 | 서울운동장 | 한국 | 2 대 2 | 일본 | |
11회 | 1983년 | 3월 6일 | 도쿄국립경기장 | 일본 | 0 대 2 | 한국 | 김종환(서울대), 백치수(한양대) |
12회 | 1984년 | 9월 30일 | 잠실종합운동장 | 한국 | 3 대 2 | 일본 | 잠실종합운동장 준공기념대회 |
13회 | 1988년 | 10월 26일 | 도쿄국립경기장 | 일본 | 1 대 1 | 한국 | 장재학(후3), 나카야마(후17) |
14회 | 1989년 | 5월 5일 | 동대문운동장 | 한국 | 1 대 0 | 일본 | 수원공설운동장에서 동대문으로 장소변경 노정윤('42,도움 김정혁) |
15회 | 1991년 | 12월 10일 | 치바 나라시노시경기장 | 일본 | 1 대 2 | 한국 | 한일축구국가대표정기전과 첫 분리개최 정재권(한양대,'13,도움 김정권) 최진규(자책골), 이지마(자책골) |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 ↑ 한일대학축구정기전 역사상 한국의 최다 득점 승리였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저격사건으로 육영수 당시 대통령 영부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불과 1달여전에 터졌었고, 이 때 문세광 신분이 재일교포였던지라 한일관계가 급랭했기 때문. 당시 국모를 또 죽인 일본에 복수하자면서 일부 극우 인사들이 단지(斷指) 시위도 벌어지는등 분위기가 매우 흉흉했고 이 상황에서 한일전을 벌이는 한국대학선발팀은 무조건 이 경기를 이겨야만 했다. 다행히 한일대학축구정기전은 4:1로 대승하며 위기(?)를 넘겼는데, 문제는 메인 이벤트격인 한일정기전에서는 1:4로 한국대표팀이 대패하는 대참사가 터져(;;) 당시 대표팀 선수들이 많은 심적 고생을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