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강제의 역사적 배경이야기가 대부분 1980년대 프로축구에 대한 이야기 인지라..이 토픽으로 복사, 분리했습니다.
1980년대 슈퍼리그 출범 배경과 슈퍼리그, 축구대제전, 그리고
현재 K리그 젊은 팬들은 잘 모르는 8~90년대 프로축구리그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1. 승강제 논의의 역사적 배경
사실 승강제에 대한 논의는 생각보다 그 유래가 훨씬 오래된 주제입니다. 그 원류는 83년 한국프로축구리그(이하부터는 K리그로 통칭) 의 창단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가죠. 아시다시피, 한국에 첫 프로축구가 출범의 논의가 본격화되기 직전인 80년 12월,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 스포츠 팀인 할렐루야 축구단이 창단되었고, 꼭 1년뒤인 81년 12월 유공코끼리 구단의 2번째 프로 축구팀 창단으로 프로리그 출범 논의가 한창 진행중에 있었습니다. 그리그 그 논의의 결과 83년 출범한 K리그의 구조는 프로팀과 실업팀이 혼재된 독특한 형국을 띄고 있었죠.
즉, 프로 2팀만으로 프로리그를 꾸릴순 없는 형국이었기에, 당대 실업리그(이하 코리안리그로 통칭)의 강호였던 국민은행, 대우, 포항제철 이상 3팀을 K리그에 참여시켜 총 5팀이 우승컵을 놓고 각축을 벌이는 시스템을 짠 것이죠.
국민은행 대우 포항제철이 83년 참가 당시에는 엄연한 실업팀이었고, 프로화는 이듬해인 84년 무렵에 마무리를 짓습니다. (국민은행은 84년을 끝으로 실업리그로 돌아갑니다. + 추가 : 초대 시즌 상무도 리그 참가를 했었으나 중도에 참가를 중단했던걸로 압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K리그가 출범할 당시 구상은 분명히 승강제의 틀을 갖췄다는 점입니다. 기존 코리안리그를 2부리그화 시키고, 83 초대 시즌이 종료된 시점에, 코리안리그 상위팀을 K리그로 승격시킨다는 것이었죠. 팀수가 불과 5개에 불과한 K리그의 협소성을 극복함과 동시에 실업리그와 K리그의 균형 발전 및 동기부여를 제공한다는 취지의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84시즌, 최우수 실업팀이었던 한일은행이 추가로 참가해 최초의 승강제가 제한적으로나마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였고, 85시즌에는 84 시즌 최하위팀이었던 국민은행이 실업리그로 돌아감에 따라 승강제의 모델이 어느정도 아귀를 맞아가는듯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양적 팽창과 겉으로 드러난 성과에 지나지 않았죠. 내부적으로는 프로팀과 실업팀간의 기량 차이와 알력 다툼, 졸지에 2부리그로 전락하고, 이도 모자라 알짜배기 팀들을 눈뜨고 코베이듯 빼앗긴 코리안리그의 반발, 83 초대시즌을 정점으로 해마다 눈에띄게 줄어가는 관중수등, K리그의 존립이 내부에서부터 뒤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85시즌 도중 사단이 납니다. 초대 K리그 챔피언이자 한국 최초의 프로스포츠팀이었던 할렐루야 축구단이 경영상의 어려움과 선교활동이라는 축구단의 존립 취지가 프로팀 운영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내부 의견에 따라, 프로 축구단 해체를 선언하고 아마축구로의 전환을 선언한 것이었죠.
이는 프로축구와 실업축구의 억지 동반자 관계가 일순간에 무너지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결국 86시즌부터는 실업팀이었던 제일은행을 코리안리그로 돌려보내고, 오직 프로팀만이 K리그에 참가할 수 있도록 규정을 바꾸면서 '수준높은 경기력 유지를 통한 관중 유치'와 '실업리그와 차별화되는 프로리그의 완전한 정착' 으로의 방향성을 정립하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당연하게도 코리안리그와의 승강제는 없던 일이 되고 말았죠.
K리그 출범당시, 있었던 실험적이고도 혁신적인 시도들은 K리그의 인기가 국가대표 성적에 극히 의존하던 초기 단계의 한계와 밀어붙이기 식으로 실업리그의 희생을 강요하고 K리그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파국 끝에 결국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이 시도들이 실패한 86년 이후, 약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K리그는 암흑기를 걸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