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U21 청소년월드컵 본선 참가 한국 대표 스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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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빠냥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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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시: 2010년2월19일(금) 13:17

역대 U21 청소년월드컵 본선 참가 한국 대표 스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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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호주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

한국 대표팀

감독 : 박상인, 코치 : 유태목

GK : 최익형, 김해운

필드플레이어
김진우, 이기형, 김재신, 이경수, 박철, 유상수, 조현, 황재필, 조현두, 전경준, 김대의, 최성용, 조진호, 최용수, 이호성, 서동원

전적
3무로 8강 진출 실패 (당시 잉글랜드, 터키, 미국과 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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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말레이시아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

감독 : 박이천, 코치 : 이영기

(괄호안은 현재 소속팀)
GK : 정유석(부산), 최현(부산)

Field player
조세권(은퇴), 한종성(은퇴), 박준홍(부산교통공사), 심재원(중국리그), 박진섭(부산), 문변모(은퇴), 남기성(은퇴), 김만중(은퇴), 김도균(은퇴), 이정민(은퇴), 서기복(은퇴), 이관우(수원), 안효연(무직), 박병주(은퇴), 양현정(은퇴), 정석근(은퇴)

어째서 부산 선수가 이리 많은거냐 ;ㅁ;

전적 1무 2패로 16강 실패.

관련 포스팅 드래그

..(전략)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지만 97년 세대는 당시에는 매스컴에서 별 오도방정을 다떨며 '역대 최강 (하기사 얘네는 맨날 역대최강이라고 하지만 ㅡㅡ;) 한국 청대 이번엔 세계 레벨의 팀과 해볼만 하다!' '세계 4강(멕시코 청소년대회)의 신화를 다시 한번 써보자!' 라고 바람잡이를 하더니 조 추첨에서 남아공, 프랑스, 브라질의 극강의 강팀들 사이에 낑겨 놓고도 '남아공은 약하다! 프랑스? 별거 아니다. 브라질? 이기지 못할 팀은 결코 아니다!' 이랬던 기억이 난다. 특히 96년 아시안컵에서 2:6 이란 알리 다에이 원맨쇼 대참사를 겪은 직후의 국제 대회였는지라 대한민국 축구팬들은 국대는 당분간 가망 없으니 파릇파릇한 새싹인 청대라도 잘 키워보자고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더랬다.

확실히 언론들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역대 최강 청대라는 타이틀을 붙이며 오도방정을 떨었을터, 그 믿는 구석이란 당연히 이관우의 존재 때문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재학 선수로 청대에서 에이스 오브 에이스의 자리에 등극 차세대 한국 축구의 대들보로 자타의 기대를 받던 천재, 동년배인 금호고의 고종수와 더불어 고등학교 축구계를 평정한 한양공고의 이.관.우 그 이름 석자의 의미는 당시 박종환 감독 욕하느라 정신없던 대한민국 축구팬들에게 희망 그 자체였다. 세계 청소년 대회 예선격인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서 대회 MVP와 우승컵을 동시에 석권하고 포부도 당당히 돌아온 이관우의 인기는 2004년 박주영 신드롬과 비교했을 때 몇 갑절은 더 강력했으면 했지 결코 모자라진 않았다. 참고로 당시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 우승은 6년만의 쾌거였으며 95년 청대는 아예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탈락으로 세계 청소년 대회에 참가조차 못했던 시절이었다. 아시아 팀쯤은 3류 듣보잡으로 깔아뭉개고 들어가는 요새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당시 청대 감독은 지금의 인천 유나이티드 총감독인 박이천 씨, 박이천 감독도 이관우 선수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급기야는 유일무이한 이관우의 라이벌인 고종수 선수를 '팀 전술에 안 맞는다, 감독 말 안 듣는다'고 청대 엔트리에서 제외시키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지금이야 인터넷 게시판이 난리가 났겠지만(..) 당시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고 고종수 선수는 오히려 당시 98 월드컵 예선 준비에 바쁜 차범근 감독의 호출로 청대는 탈락하고 국대에 입성하는 기묘한 기록을 남겼다.

드디어 97년 6월 말레이시아에서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가 열렸다. 첫번째 상대는 남아공. 당시 아프리카 팀은 한국언론에게는 1승추가를 위한 손쉬운 제물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었고 (실제로 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국가대표 A매치에서 아프리카 국대를 상대로 승률이 상당히 높다. 물론 홈 어드밴테이지의 어마어마함을 간과해선 안된다.) 경기내용 자체도 한국팀의 압도적인 우세였다는 증언이다. 물론 어린 시절의 나한테야 골도 안들어가는 시시한 경기였을 뿐이었지만(..) 그러다 후반 30여분 즈음 이관우 선수가 결정적 찬스(찾아보니 공격 3 VS 수비 1이었다..;;)를 달려가는 선수에게 패스 안해주고 혼자 똥볼로 날려먹으면서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2002년 독일전 이천수 선수가 오버랩 되는건 왜일까 ..;; 결국 0:0 경기종료. 암만 압도적 경기내용이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록만 남는다.

언 론은 물론 아쉬운 무승부, 다 잡은 승기를 놓친 대한민국 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며 다가오는 대 프랑스전 분석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분석이라고 해봐야 프랑스를 이기지 못하면 조별 예선 탈락이 확실시 된다는 결론밖에 안 나왔지만 (..) 하지만 그들은 프랑스 청대에 그야말로 앙팡 테리블이 그것도 둘씩이나 있었음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 이름은 앙리와 트레제게 ........... 답이 안 나온다. 순간 정신이 멍해지는 건 나뿐이 아니리라 믿는다. 물론 당시 앙리는 지금처럼 센터포워드가 아니라 처진 윙포워드에 가까웠지만 포지션이 다르다고 그 포스가 어디가겠나.. 대학살의 예견을 지금의 우리야 당연히 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앙리나 트레제게나 모두 프랑스의 뽈좀 차는 소년에 불과했다. 물론 경기 시작 전까지만..

드디어 경기 시작. 그야말로 한국 수비진의 수난시대가 시작됐다. 당시 한국 미들진은 이관우 하나만으로도 미칠듯한 포스를 뿜어댔지만 수비진과 공격진은 미들진을 뒷받침 해줄 중량감이 너무도 떨어졌다. 당시 한국 청대 수비진은 조세권, 한종성, 박준홍, 심재원, 박진섭, 남기성, 김만중 정도다. 이 중에 박진섭, 심재원 빼고 아는 사람 있으면 손~?(;;;) FM에서 K리그 마니아나 K리그를 몇년째 관전한 이들 정도 돼도 이들의 이름을 다 꽤차고 있는 사람은 없을듯하다. 참고로 얘기하면 2007년 현재 위의 7인중 K리그에 뛰는 선수는 조세권 (울산) 심재원 (부산) 박진섭 (성남) 뿐이고 한종성 박준홍 김만중 선수는 모두 자유계약 방출 뒤 은퇴 김만중 씨는 현재 김희태 축구센터에서 코치로 활동중이며 남기성 선수는 3시즌째 내셔널리그 수원시청에서 활약하고 있다.

다 시말해 이들에게 앙리나 트레제게를 막으라는건 계란투석이었다. 앙리의 미칠듯한 드리블 돌파에 한국 수비진들은 뚫리다 못해 앙리의 뒷꽁무니를 쫒는것도 주력이 딸려 (볼 잡은 선수를 상대로 달리기 속도가 뒤졌다는 말이다 OTL..) 나가떨어졌고 그걸 중계방송으로 지켜봐야했던 한국 축구팬들은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해설진들이 앙리는 세계적 선수가 될거라고 호언장담을 하며 한국 수비진들에게 위로아닌 위로를 보냈고 그 호언장담은 현실이 되었다. 어찌되었든 프랑스의 일방적 공세앞에 4골밖에 안 먹은걸 위안으로 삼아야할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황금 미들진은 뭘 했을까?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다. 분명 이관우 선수를 필두로 분전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미들진이나 공격진중 프랑스를 상대로 골문을 연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가장 처참하게 무너진 한국 수비진에서 그것도 2골이나 만회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그것도 한 명의 한국 수비수가 말이다. 대 프랑스전 대한민국의 영패를 모면하며 그 이름을 빛냈으니 그 선수가 바로 박진섭 선수다. 박진섭 선수의 숨겨두었던 공격본능은 훗날 2003년에 다시 대오각성하게 되는데 뭇 사람들이 기억하듯이 대한민국 A매치 최다골 16:0의 기록을 세운 네팔전이 그것이다. 박진섭 선수는 이 경기에서 혼자 5골을 넣으며 당시 코엘류 감독이 새로운 공격자원을 찾았다! 라는 감탄을 불러 일으키게 만들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뒤로 박진섭 선수는 국대와 인연이 멀어졌고 코엘류도 경질되었으니 (..) 그리고 덧붙여 네팔전은 이관우 선수의 A매치 첫번째골이 작성된 경기이기도 했다. 6년의 간극을 두고 이어진 축구의 인연이란 기묘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결론는 어쨋든 2:4 패배. 이제 언론은 대한민국 축구의 고질적 문제는 수비! 세계의 벽은 역시 높았다! (이들의 제목짓는 센스의 한계 또한 고질적인 문제로 보인다..ㅡㅡ;)라는 타이틀로 청대의 조별예선 통과 사실상 불가능함을 보도했고 한편에서는 브라질 전에서의 대한민국 청대의 분투를 기대하는 기사도 실렸다. 불운하게도 당시 대한민국 축구팬들은 자신들이 안드로메다 관광 티켓에 당첨되었음을 상상조차 못했으리라.

마지막 브라질과의 경기. 이 경기에서 한국 축구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역사가 다시 쓰여졌다. 역대 한게임 최다골(13골), 한팀 한게임 최다골(10골), 개인 한게임 최다골(6골,ADAILTON)이 이 경기에서 작성되었다. 중계진과 한국 축구팬들은 문득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깨달았고 소처럼 웃었다 한다(...) 의외로 당시 해외 언론은 브라질의 10골보다는 대한민국이 3골을 넣었단 사실에 더 감동했다는 후문도 들리나 안드로메다 관광 스코어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당시 박이천 감독 이하 선수단은 한국땅을 밟을 수 없을것이라는 예언을 남겼고 선수단 전원이 말레이시아 국적 취득 추진중이라는 우스개도 들렸다. 다행히도 16강전에서 벨기에가 브라질에게 10:0으로 우주 끝 저너머로 관광간 덕분(?)에 무려 3골이나 넣은 대한민국 선수단은 무사히 귀국길에 오를수 있었다.

아무튼 97 세계 청소년 대회 대한민국 청대는 대한민국 축구의 골짜기 세대로 통했고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신기한건 당시 그렇게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축구를 보여줬던 브라질 청대가 아르헨티나 청대에게 2:0으로 패배하며 우승에 실패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당시 97 브라질 청대 중 오늘날 성공한 선수가 첼시의 ALEX 한 명뿐이라는 점이다. 대한민국에 6골을 퍼부으며 득점왕에 오른 ADAILTON은 현재 세리에 B를 전전한다하고 수비수였던 VINICIUS는 작년 K리그 울산에서 뛴 그 비니시우스 선수다 (..) 혹자는 97 브라질 청대의 화려한 비상과 초라한 오늘날을 빗대어 단군의 저주(?)라고 칭하나 믿을바는 못된다. 오히려 단군의 저주는 97 대한민국 청대가 제대로 받은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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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나이지리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감독 : 조영증, 코치 : 이재희

GK : 김용대, 한동진

필드플레이어
안홍찬, 박동혁, 이범직, 신동근, 송종국, 김건형, 전재호, 나희근, 서기복, 김경일, 설기현, 고봉현, 김은중, 서관수, 우진석, 이동국

전적 1승 2패로 16강 실패

관련 포스팅 (2008년 5월 작성했던 일부 선수 근황)

안홍찬 : 성균관대에서 가장 전도유망한 수비수로 기대 받았음. 졸업과 동시에 상무에 입단 (아직 상무 K리그 참여 전이었음)
2002년 FA컵 출전을 마지막으로 상무 퇴소 후 기록이 전무합니다. 따라서 프로 통산 기록도 전무


이범직 : 코너킥 상황에서 문전 헤딩슛으로 청소년대표 아시아 예선에서 2골을 기록하며 기대를 모았음.
대구대 졸업 후 부천에 입단했으나 대구대 재학시절 입은 무릎부상으로 인해 별 활약도 없이 방출. K리그 통산
출전 0경기 출장기록. 현재 K3 천안 FC에서 플레잉 코치로 뛰고 계십니다.


신동근 : 99 청대 선수단 중 최연소 선수이자 김경일 선수와 함께 초고교 유망주로 통했습니다. 졸업 후 연세대에 진학,
선배인 송종국과 함께 대학 무대를 평정해버렸지요. 전 연대 감독이었던 김호곤은 신동근의 기량을 극찬하며 히딩크에게 추천 아마추어 선수로 히딩크 호에 테스트 선수로 뽑혀 잠시 대표팀 선수와 함께 훈련한 경험도 있습니다.
03년 성남에 입단. 입단과 동시에 무릎 부상으로 독일에서 수술 후 1년간 재활치료. 05시즌 개막 직전, 이번에는 발목 부상을 입어 05시즌 1경기 출장에 그쳤고 06시즌 시즌 오프기간에 발가락 부상까지 당하며 한 때 방출설까지 나돌았으나 성남 2군서 계속 뛰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었죠. 현재는 광주 상무에 08시즌부터 입대한 상태이지만 상무에서도 선발 출장은 요원한 상황입니다. 성남에 돌아와도 자리가 있을 것 같진 않네요.


김건형 : 99 청대에서 가장 유명한 골인 대 포르투갈 전 중거리 슈팅의 주인공. 캐논 슛터 노상래 이기형의 계보를 이을
재목으로 기대를 많이 받았습니다. 경희대 졸업 후 00시즌 울산에 입단. 컵대회 개막전에서 전남을 상대로 역전골을 뽑아내는 등 데뷔 초 환상적인 기량을 뽐냈었지요. 여담으로 당시 컵대회 개막전에서 울산이 뽑아낸 4골 중 3골이 그 해 신인이었던 박규선, 최철우, 김건형이 득점해내며 당시 울산 감독이었던 고재욱 감독이 이번 시즌 신인은 정말 대어들만 물어왔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김건형 선수의 이 골은 울산에서의 첫골이자 동시에 마지막 골이 되버렸었죠.

데뷔 2년차, 발목 통증이 찾아와 검사를 받아보니 발목 복합 골절. 곧바로 수술과 재활에 들어갔으나 발목 연골이 기형적으로 손상돼 경기를 오래 뛸 수 없다는 선수생명에 치명적인 결과를 안은 채 필드에 돌아와야했습니다. 결국 01시즌 1경기, 02시즌 2경기 교체 출장을 끝으로 울산에서 방출된 김건형 선수는 신생구단인 대구에 입단하며 많은 경기를 뛰진 못했지만 당시 암울했던 대구 공격진에 소금같은 존재로 아직도 대구팬들의 기억속에 남아있습니다. 결국 04시즌을 끝으로 이른 나이에 은퇴. 현재는 어디 마산인가? 고등학교 체육 선생님으로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김 경일 : 광양 제철고가 낳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대한민국 비운의 축구천재 계보를 작성하면 으레 반드시 포함되는 선수가 김경일 선수이지요. 96년 광양 제철고의 창단 멤버로 광양제철고 초대 감독이었던 기영옥 감독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광양 제철고에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축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광양 제철고는 창단 2년만에 97,98 2년 연속 전국대회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게 되는데 고교 축구 인사들은 광양제철고 전력의 8할이 김경일 선수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었다고 하네요. 당시 광양제철고 감독이셨던 기영옥 감독은 지금은 기성용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져 있으시지만 당시에는 금호고 감독으로 윤정환, 고종수를 길러낸 전력이 있어 고교축구계의 마이다스 손으로 통하셨죠. 고교축구계에서는 기영옥 감독의 3번째 작품은 김경일 선수라고 입을 모았고 기영옥 감독 본인도 '고 3 시절 김경일 선수의 실력은 같은 나이때의 윤정환 고종수를 뛰어넘었었다.'고 회고할 만큼 김경일 선수의 천재성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극단적인 예로 당시 광양제철고 주전스트라이커는 김해출 선수였는데 이 선수는 96,97 2년 연속 이동국 선수와 고교 득점왕 경쟁을 벌일 정도로 잘 나갔던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스카우터들의 평가는 냉정하기 그지 없어 '김경일 선수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반쪽짜리 선수'라고 혹평했고 실제로도 전남에서 우선지명 형식으로 입단했으나 통산 정규리그 3경기 교체출장에 그치며 소리소문없이 방출, 은퇴해버렸습니다. 가끔 김해출 선수도 비운의 유망주로 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당시 김해출 선수의 플레이를 보신 분들의 말로는 그 정도로 평가를 받을 정도의 기량은 아니었고 김경일 선수의 후광을 입은 바가 컸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여하튼 초고교유망주로 통했던 김경일 선수는 99년 전남드래곤즈에 우선지명으로 입단, 계약금 및 연봉수당 등에서 98년 신인왕이었던 이동국 선수가 포항 입단할 때와 거의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화려하게 입단하게 됩니다. 그 정도로 김경일 선수에 거는 전남의 기대는 컸었지요. 겹경사로 청소년대표에서 김경일 선수를 호출하며 98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때부터 주전이었던 고 정용훈 선수를 밀어내고 99년 나이지리아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본선행 최종 엔트리에 발탁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청소년대표 감독이 98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우승을 이뤘던 박창선 감독에서 조영증 감독으로 전격 교체되면서 김경일 선수가 조영증 감독이 구상했던 4-3-3 플랫의 구심점으로 점찍힌 것이었죠. 가끔 생각하는게 만약 고 정용훈 선수가 이때 청대 본선 최종 엔트리에 참가하고 베스트 일레븐으로 뛰며 슬럼프 없이 시드니 올대까지 순조롭게 발탁되었더라면 정용훈 선수가 이토록 빠르게 잊혀지고 있진 않을꺼라는 생각도 드네요. 여러모로 아쉬운 장면이에요 ;ㅅ;.

어찌되었든 99년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가 개막하자 한국 언론은 '이번에야 말로 4강 신화 재현! -_-;;' 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김경일 선수에 대한 관심도 높았지요. 혜성처럼 등장해 조영증 감독의 신임을 받으며 당시 주장까지 맡았던걸로 기억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특히 광양제철고에서의 활약을 자세히 소개하며 '윤정환의 패스와 서정원의 활동량이었던가요 'ㅅ'?' 아무튼 별의별 호칭이 다 갖다붙이며 김경일 선수에게 기대를 모았지요. 그리하여 세계 청소년 대회 본선 3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하며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만.. 문제는 플레이가 기대 이하였다는거였지요.. -_-

조영증 감독은 김경일 선수에게서 96 애틀란타 올림픽에서의 윤정환과 같은 플레이메이커의 전진패스를 바랬던 것 같지만 포르투갈 우루과이 선수들의 압박과 볼경합에서 맥없이 무너지며 장기인 전진 패스 시도 조차 여의치 않았습니다. 종국에는 한국 수비수들이 김경일 선수를 무시하고 공격진에 롱패스를 지르는 소위 뻥축구로 전락하며 한국 청대는 스스로 자멸의 길을 택해버렸지요. 여기에는 조영증 감독의 선발진 구성 미스와 당시로서는 생소한 전술이었던 4-3-3 전술을 3-5-2에 익숙해있던 한국 청대 선수에게 적용했던 실책도 한 몫했습니다. 98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 우승 당시 대한민국 청대가 3-5-2 전술로 우승했던 것이었으니까요. 다행히 마지막 말리전에서 4:2로 승리하며 체면치레는 했지만 같은 대회에서 일본 청대는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 축구팬들은 절망할 수 밖에 없었지요 특히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결승에서 한국 청대가 일본 청대를 2:1로 격파한지 1년도 채 안되었었기 때문에 충격은 더 했습니다. 결국 99 청대의 참담한 실패에 대한 비난은 조영증 감독과 김경일 선수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졌죠.

하지만 조영증 감독은 김경일 선수를 지칭하며 '이제 국제경험도 쌓았으니 더욱 성장할 것이다.'라고 따로 언급할 정도로 김경일 선수의 미래는 밝아보였습니다. 99시즌 개막되기 전부터 공공연히 올해의 신인왕은 김경일이 따놓은 당상이라고 말할 정도로 K리그 팬들도 김경일에 대한 기대가 컸었죠. 그러나 정규리그 3경기 출장만에 새끼발가락 피로골절 판정을 받으며 최소 6개월은 쉬어야한다는 진단을 받으며 사실상의 시즌아웃. 장미빛 미래가 보장되있었던 것 같았던 김경일 선수의 인생에 부상신의 악령이 이때부터 머물기 시작합니다. 거기다 김경일 선수도 젊은 혈기에 부상이 완쾌되지도 않았는데 3개월만에 필드에 다시 섰다가 시즌 아웃뿐만아니라 이듬해인 00시즌까지 무출장에 그치고 말았지요.

그 렇게 2년이 흘러 01시즌 대 안양전에서 오랜만에 전남 선수로 나섰지만 역시 1경기만에 무릎 통증으로 인해 진단을 받고 구단의 배려로 독일로 수술길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재활 도중 또다시 찾아온 무릎통증으로 이번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수술 또 수술 ..... 결국 02.03시즌까지 무출장에 그치며 김경일 선수의 이름은 팬들의 머릿속에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조금 몸이 나아져서 훈련을 받다보면 무릎 관절이 계속 탈골 되버렸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한 경험이었을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04시즌 전남에서 방출 통보 후 대구에 입단했지만 박종환 감독께서는 '어떻게 몸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 가 있느냐!?'며 안타까워 하셨다고 하네요. 결국 05시즌 선수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의사의 선고와 함께 은퇴하게 됩니다. 무릎이 자꾸 탈골된 이유가 선천적으로 무릎뼈의 바깥부분이 함몰돼 있는 기형이라 애시당초 축구화를 신어선 안되는 운명이었다는 거짓말 같은 진단과 함께 말이지요... ㅜㅜ..

그렇게 김경일 선수는 사라졌고 가장 최근 김경일 선수에 대한 소식은 축구교실을 열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덧붙여 인천의 윤원일 선수 였나요. 그 선수 인터뷰 기사에서 지나가는 말로 김경일 선수에 관해 언급한 구절이 있더군요.
' 제 축구 인생에서 제일 볼 잘 차는 선수를 꼽으라면 주저않고 김경일 선수에요. 정말 볼을 잘 찼죠. 근데 계속 부상.. 재활 다시 부상.. 필드에 서있는 시간보다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더 많았으니까요. 김경일 선수를 보며 실력이 있어도 프로로 성공할 수 없는 경우도 있구나. 그때 처음 알았었습니다.'
칫통
레프리(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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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시: 2010년1월10일(일) 23:10
위치: Suwon

김경일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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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빠냥꾼 님이 쓰셨습니다:결국 04시즌 전남에서 방출 통보 후 대구에 입단했지만 박종환 감독께서는 '어떻게 몸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 가 있느냐!?'며 안타까워 하셨다고 하네요. 결국 05시즌 선수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의사의 선고와 함께 은퇴하게 됩니다. 무릎이 자꾸 탈골된 이유가 선천적으로 무릎뼈의 바깥부분이 함몰돼 있는 기형이라 애시당초 축구화를 신어선 안되는 운명이었다는 거짓말 같은 진단과 함께 말이지요... ㅜㅜ..


신감독횽이 김경일 뭐 하냐고 해서.. 나는 대구에 뛰던 김경일 밖에 모른다고 했더니..
둘이 동일인이었네요..ㅎㅎㅎㅎ
부산빠냥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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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259
가입일시: 2010년2월19일(금) 13:17

Re: 역대 U21 청소년월드컵 본선 참가 한국 대표 스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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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인이죠 ^ㅆ^.. 근데 대구빠들도 김경일 선수가 뛰었나 기억을 못하는 ㄱ-
칫통
레프리(중재)
포스트: 1702
가입일시: 2010년1월10일(일) 23:10
위치: Suwon

김경일 대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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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빠냥꾼 님이 쓰셨습니다:동일인이죠 ^ㅆ^.. 근데 대구빠들도 김경일 선수가 뛰었나 기억을 못하는 ㄱ-


검색해보니 대구에서 2004년도에 6경기 뛰었는데 (리그 5경기,컵 1경기)
전부 교체로 들어갔음..풀타임 한번 없이...기억하기 어려운게 당연할 듯..
나도 이름만 기억나는 수준인디..ㅎㅎㅎㅎ
부산빠냥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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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259
가입일시: 2010년2월19일(금) 13:17

비운의 축구천재 포스트라도 만들어야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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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 원래 성공한 사람보다는 타고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스러져간 선수들이 더 애증이 남는 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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