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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방직 == '''조선방직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 일제가 한국에서의 목화의 재배와 매매 및 면사방직과 판매에 대한 영리를 목적으로 1917년 11월 범일동일대에 세운 일본 미쓰이재벌<ref>미쓰이 자이바츠(三井財閥)는 일제시대 미쓰이은행과 미쓰이물산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재벌로 미쓰비시, 스미모토와 더불어 일본의 3대 재벌(자이바츠)이였다. 종전 후 미군정시기 재벌은 해체되어 느슨한 기업집단이 되었다. 도시바, 미츠코시, 산토리, 도요타자동차도 과거 미쓰이재벌계열사.</ref>계의 방직회사이다. 1925년 부산공장에서 조면업을 시작하여, 1928년 대구공장 설립 등을 거처, 사리원 및 진남포공장(1933), 원주공장(1934), 대전공장(1935), 안동공장(1936), 춘천공장(1937), 김천공장(1939) 등 철도를 중심으로 공장을 설립하며 조면업을 확장시켜갔다. 1933년 지정공판제의 강화로 인한 재벌자본 중심으로 조면업 개편, 일제의 군수공업화정책에 편승하여 사업을 확장시켜 같은 미쓰이계의 남북면업과 더불어 조선 최대의 조면업체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일본경제의 일부로 작동하던 한국내 공업들은 해방 이후 일본과의 단절로 재생산구조가 붕괴되어 혼란을 겪어야 했으나, 면방직공업만은 예외였다. 대규모 산업시설, 원면 제고 및 원조원면의 원활한 공급, 시장 수요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 가장 먼저 조업을 재개할 수 있었으며, 그 중 조선방직이 단연 돋보였다. 조방은 전국 17개 지역의 모면공장과 2차 가공공장으로 1941년 세워진 대구 메리야스 공장<ref>당시 메리야스는 속옷용 원단을 칭했다.</ref>을 보유한 한국 최대의 면방직회사로 미군정의 직접통제하에 들어가 상무부 산하에 방직공장 운영부를 설치하고 귀속방직 공장을 직접관리하다가 정부 수립후 상공부 산하의 기업이 되었다. 1949년 2월에는 상공부 지시에 의해 대구 메리야스 공장을 분리<ref>대구메리야쓰공사라는 이름으로 분리되었다가 1955년 불하되어 내외방직이 되었다. </ref>하고 11월에 정부의 방적관계 사업체 통합운영방침에 따라 '''대구방적공사'''(구 군시방적)을 흡수 통합하여, '''조선방직 대구공장'''이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 피해가 없이 가동된 방직회사는 조방 부산공장과 조방 대구공장, 삼호방직 뿐이었다. 방적기가 4만여추에 달하는 조선방직에 비해 삼호방직은 1만여추에 불과했기 때문에 조방의 위상은 더더욱 격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인해 정치권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자신과 정치노선이 다른 실업가 김지태에게 경영권이 넘어가는 것을 우려한 이승만이 해당 불하를 취소하고 1951년 9월, 자신의 측근 강일매를 관리인에 임명하였다. 이에 반발한 조방노조가 1952년 파업이 일으켰으나, 이승만은 초지일관 강일매를 지지하였다. 이후 1955년 2월 대구공장의 분리와 동시에 부산공장은 강일매에게 임대되었다가 그 해 8월, 35억환에 강일매에게 불하되었다. 그러나 방만한 경영과 시설 개선에 쓰여야할 자본이 자유당의 정치자금으로 들어가면서 시설의 노후화, 체불임금으로 인한 파업, 불하대금의 연체 등 자금난이 가중되어 불하 3년 만에 불하금의 2배에 육박하는 55억환에 달하는 부채를 지면서 강일매는 몰락하였고 강일매 사후 삼호방직 정재호에게 다시 인수되었으나 결국 막대한 부채를 안은채 1968년 4월 [[부산광역시|부산시]]로 넘어가게 되었다. 부산시는 조방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시청 등 각종 공공시설을 이설하여 새로운 도시중심지를 조성하기 위해 그해 5월 1일 범일지구 재개발사업 기공식을 시행하였고 조방은 문을 닫았다. 조선방직은 1969년 7월 법인청산 절차가 종결되면서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조선방직이 있었던 자리에는 부산시민회관, 한양과 삼익아파트, 자유시장, 평화시장과 각종 호텔, 예식장이 들어서 있으며, 현재도 조방 또는 조방앞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ref>조방낙지가 바로 이곳이 원조. [http://www.busan.go.kr/06_intro/02_history/05_03_16.jsp 잊혀진 부산역사-조선방직주식회사] [[부산광역시]] 홈페이지</ref> === 조선방직 대구공장(대구방직) === [[파일:대구2공단.jpg|썸네일|380픽셀]] '''조선방직 대구공장'''은 일제강점기 조선방직이 소유하고 있던 대구 메리야스공장과는 별도의 공장으로 1940년 5월 일본 교토부를 거점으로 일본 제사업계를 양분하는 군시제사(郡是製絲.군제세이시)의 자본에 의해 세워진 '''군시방적'''(郡是紡績,군제보세키) '''대구공장'''이 모태이다. 방적기를 3만5천여추 보유하고 있었으나 해방 직후인 9월 일본인이 철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후 미군정에 적산으로 접수되어 불타버린 설비를 정비하여 1947년 현재의 위치에서 조업을 재개하였으며, 기존 부지에는 [[대구시민운동장|대구운동장]]이 건립되었다. 1949년 2월 '''대구방적공사'''(大邱紡績公社)로 개칭되었다가 1949년 방직관계사업체 통합분리운영방침에 따라 11월 조선방직에 통합되어 조선방직 대구공장으로 변경되어 운영되었다. 그러나 양 공장은 생산관리가 융합되지 않아 제품원가까지 다를 만큼 독자적으로 운영되다시피 했을 정도로 경영상 비효율적이었다. 이처럼 독자 운영되다시피 했으므로 조선방직 대구공장이라는 정식명칭 외에 '''대구방적''', '''대구방직''', '''대구조방''', '''조방대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결국 방만한 운영구조는 양 공장 모두에 부담이 되었고 특히 사장이 직접 경영하는 부산공장에 비해 상무이사가 경영하는 대구공장의 운영은 더욱 심각했다. 대구공장은 한국전쟁 당시 전화를 빗겨가긴 했으나, 재생 설비와 전쟁시 소개되었던 설비 등을 모아 운영한탓에 설비효율성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 <ref>그러나 결국 불하 후 조선방직 부산공장은 망했고 대구공장은 대한방직 대구공장으로 살아남았으니 아이러니. 참고로 당시 대구공장의 경영을 책임지던 상무이사가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씨였다.</ref> 이후 1955년 2월 대구공장이 따로 분리되었으며, 5월 대한방직에 임대되었다가 8월 7억환에 대한방직 사장이자 자유당의 재정부장이었던 설경동에게 불하되어 '''대한방직 대구공장'''이 되었다. 대한방직 대구공장은 1997년 폐쇄되었으며, 2002년 공장터를 개발하여 현재 침산 푸르지오 1차 아파트와 메가박스 대구점과 [[이마트]] 칠성점이 입주해 있는 쇼핑몰 스펙트럼시티를 건설했다. 스펙트럼 시티에 있는 대한방직 대구사무소에서 아직도 분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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