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주 메뉴
주 메뉴
사이드바로 이동
숨기기
둘러보기
대문
사용자 모임
요즘 화제
최근 바뀜
모든 문서 보기
임의의 문서로
도움말
풋케BBS
FootballK WIKI-
검색
검색
보이기
계정 만들기
로그인
개인 도구
계정 만들기
로그인
로그아웃한 편집자를 위한 문서
더 알아보기
기여
토론
실업축구
편집하기 (부분)
문서
토론
한국어
읽기
편집
역사 보기
도구
도구
사이드바로 이동
숨기기
동작
읽기
편집
역사 보기
일반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보이기
사이드바로 이동
숨기기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초창기 실업축구== ===실업팀들의 등장 (1910년대-1930년대)=== 대한민국 실업축구의 시작은 20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축구 붐과 함께 학교팀, 학교 OB(졸업생)팀, 순수 동호회 팀과 같은 각종 유형의 클럽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같은 직장 내 사람들로 이루어진 실업팀들도 등장한다. 특히 상공업이 발달했던 서울과 평양 두 도시를 중심으로 실업팀들의 활동이 활발했으며, 이들은 전국 단위 대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가령 1921년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에 [[조흥은행 축구단|한성은행]](조흥은행의 전신) 축구팀이 참가한 기록이 있으며, 1922년 [[제2회 전조선축구대회]]에는 평양의 [[주작구락부]]라는 실업팀<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2021400209203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2-02-14&officeId=00020&pageNo=3&printNo=535&publishType=00020]</ref>이 참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실업팀에 대한 체계적 운영에 있어서는 서울에서 열린 [[전조선축구대회]]([[대한체육회|조선체육회]] 주최)보다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축구대회 (관서체육회)|전조선축구대회]]([[관서체육회]] 주최)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1930년 평양에서 열린 제6회 전조선축구대회(관서체육회 주최)에서부터는 실업부가 창설되어 평양 일대의 실업팀들이 참가하게 되었으며, 1942년 마지막 대회에서는 경평실업대항전이라는 부문이 따로 만들어져 평양과 서울의 실업팀 연합이 2경기를 치룬다.<ref>大韓蹴球協會 편 『韓國蹴球百年史』라사라, 1986. p.544-549.</ref> ===경성실업축구연맹 결성과 실업축구리그 (1939년)=== 한편 1939년에는 서울 일대의 실업축구계 인사들이 모여 '''경성실업축구연맹'''을 만들고 '''[[1939년 실업축구|제1회 실업축구리그]]'''를 개최한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906140020920202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9-06-14&officeId=00020&pageNo=2&printNo=6398&publishType=00020]</ref><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911110020910202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9-11-11&officeId=00020&pageNo=2&printNo=6547&publishType=00010]</ref>. 비록 이 리그는 1회를 끝으로 중단되지만, 경성실업축구연맹은 이후 서울시실업축구연맹으로 이름을 바꾸며, 이후 한국실업축구연맹으로 이어진다. 당시 가맹 단체로는 주로 경성을 기반으로 했던 공기업이나 은행, 사기업체들이 있는데,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대한민국 실업축구의 근간이 된다. 이처럼 [[서울특별시|서울]]이 한국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서 주요 기업들의 본거지라는 점에서 실업축구의 활동도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역으로 이후 40여년 간 한국축구에서 1부 리그 역할을 하는 실업축구에 지역 연고 도입을 어렵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해방과 한국전쟁 직후 (1940년대-1960년대 초)=== 해방 이후인 1946년부터 [[서울신문]] 주최로 다시 실업축구대회가 열린다<ref>[http://db.history.go.kr/front2010/dirservice/ibrowser/viewIpqDataNP.jsp?pItemCode=np&pIpqParam=np_fp_19460806_v0002&pLevel=6&pDatabaseID=np_fp&pRecordID=np_fp_1946_08_06_0300&pTitle=%ec%9e%90%ec%9c%a0%ec%8b%a0%eb%ac%b8+%3e+1946%eb%85%84+08%ec%9b%94+06%ec%9d%bc]</ref>. 1949년에는 [[대한축구협회]] 서울시지부 주최로 리그의 틀을 갖추어 봄과 가을 서울시실업축구연맹전을 개최하며<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5180020920200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5-18&officeId=00020&pageNo=2&printNo=7907&publishType=00020]</ref>, 1946년 이후 매년 열리던 실업축구대회는 그 사이에 열려 일종의 리그컵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한국 전쟁|한국전쟁]]으로 인해 1950년 춘기 실업축구연맹전을 끝으로 모든 실업축구대회는 중단된다. 1950년대에 실업축구 자체만을 위한 대회나 리그의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우며, 다만 [[전국 축구 선수권 대회|전국축구선수권대회]]나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대통령배쟁탈축구대회]], [[전국체육대회]] 및 [[전국도시대항축구대회]] 등에 실업팀들이 참가했던 기록은 있다. 이렇게 1950년대가 끝나고 1960년대가 시작된다. [[AFC 아시안컵|아시안컵]] 2연패 달성, 여러 실업팀의 창단 등으로 축구의 열기가 뜨거워져 가는 가운데, 1960년 8월 서울특별시체육회 주최 실업축구대회가 열린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82700329104014&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60-08-27&officeId=00032&pageNo=4&printNo=4449&publishType=00010]</ref>. 1963년 3월에는 경남축구협회와 [[국제신문|국제신보]]사 공동 주최로 부산공설운동장에서 군실업대학초청축구대회가 열리며<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30600329206014&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63-03-06&officeId=00032&pageNo=6&printNo=5340&publishType=00020]</ref>, 이어 6월에는 대한축구협회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춘계 전국일반및군,대학종별축구리그전이 열린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52700329206015&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63-05-27&officeId=00032&pageNo=6&printNo=5410&publishType=00020]</ref>.
요약:
FootballK WIKI-에서의 모든 기여는 다른 기여자가 편집, 수정, 삭제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자세한 사항은
FootballK WIKI:저작권
문서를 보세요).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