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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수 생활 = == 유소년 시절 ==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최진한은 축구광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매주 조기회에 나가 볼을 찼고, 축구장을 순회하며 경기를 찾아다녔다. 그러한 성장 배경이 있었던 덕에 최진한은 아주 어릴적 부터 공을 접하면서 유리창을 수시로 깨먹었다고.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바로 축구선수의 길을 택하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최선수가 다니던 진주중앙초등학교에는 당시 축구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축구 대신 육상을 시작한 그는 육상을 통해 기초 체력을 다지는 한편, [[조광래]] 등 볼 좀 찬다는 선배들이 다니던 조기회에 나가 공을 찼다. 이후 육상 특기생으로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축구를 하기 위해 축구부가 있는 진주중학교로 전학하여 축구를 시작했다. 남들보다 축구를 늦게 시작해 기본기가 부족해 하루 종일 공만 붙들고 있을 정도로 기본기에 매진했다고. [[진주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故 [[강수길]] 감독의 지도 하에 진주고 1학년 중 유일하다시피 주기적으로 경기에 출장하며 실력을 쌓았다. 진주고 졸업때 즈음에는 이미 초고교급 선수로 평가받으며 수많은 실업팀과 대학팀의 관심을 받았고, 최선수는 [[명지대학교]]에 진학하게된다. 명지대 시절 초반에는 체력적인 단점을 도출하며 잠시 부진하였지만, 꾸준한 노력 끝에 약점을 보완한 최진한은 대학 4학년때 [[상무 축구단]]을 누르고 [[대통령배전국축구대회]]에서 명지대를 우승시키며 득점왕, MVP를 싹슬이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렇게 [[공격형 미드필더]]로 대활약을 펼친 최진한은 1984년 88 올림픽대표팀에도 선발, [[메르데카배]]에 참가하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 프로 시절 == [[파일:최진한1.jpg|200픽셀|섬네일|럭키금성 시절 최진한<br/><del>어째 지금이 더 젊어보여..</del>]] 명지대학교 졸업 후, 당시 [[진주시]]에 연고가 있던 [[럭키금성 황소]]에 입단한 그는 럭키금성<ref>LG 치타스 포함</ref>에서 보낸 7시즌동안 151경기에 출장, 21득점 15도움을 기록하며 대활약하였다. 1986시즌 후반부 3골을 터뜨리며 팀의 후기 리그 우승에 기여하지만,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하며 [[포항제철 아톰즈]]의 우승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당시는 제대로 된 선수 관리 체계가 잡히지 않아 선수 혼자 재활해야 하는 상황이 많았기에 재활이 더디어 더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는 1989년 럭금의 주장을 맡은 뒤, 1990시즌에는 [[윤상철]]과 함께 18골 7도움을 합작<ref>최진한의 기록은 27경기 6골 5도움 '''0경고 0퇴장'''</ref>하며 럭금의 창단 후 첫번째 우승을 이끌었고, 1990시즌 MVP까지 수상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1990시즌 최고의 활약을 뒤로 하고 91시즌을 맞이하려던 최선수에게 큰 시련이 닥치게된다. 당시 K리그 구단들은 1984년 제정한 프로선수 관리세칙에 의거해 '''한팀에 입단한 선수는 6년간 소속팀을 바꿀 수 없다.'''는 규정과 함께, '''설사 특정 선수의 6년 계약이 만료된다하여도 원 소속팀이 해당 선수와의 재계약 포기 이전까지는 다른팀이 선수와 협상할 수 없고, 설사 협상한다해도 그 계약금은 3천만원으로 이하로 한다.''' 는 이면적 담합을 구성했었고, 이러한 선수의 FA 권리 행사를 원천봉쇄하는 악규정을 근거삼아 럭키금성은 최선수와의 연봉협상에서 낮은 연봉 인상폭을 제시했던 것. 이에 강력 반발한 최선수는 럭금에서 태업을 벌였고,<ref>91년 1월 일본진출까지 선언했었으나, 무산되었던바 있다.</ref> 결국 1991년 7월 럭키금성은 최선수의 방출을 선언한다. 무직 선수가 된 최선수를 노린 팀은 [[유공 코끼리]]. 하지만 유공은 최선수의 연봉 인상 요구를 럭금과 마찬가지로 무시했고, 이에 상심한 최선수는 은퇴까지 고려하다 동년 7월 31일 유공에 입단하기로 결심한다. 씁쓸한 항복선언이었던 셈. 이후 그는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변경, 18경기에 나서 12골을 기록하면서 [[커리어하이]]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92시즌, [[김정남]]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고, 당시 코치로 일하던 [[박성화]] 씨가 감독으로 승격되면서 팀에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하였고, 결국 그는 1992년 11월 18일, [[대우 로얄즈]]와 의 경기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명목상 은퇴 경기로 처리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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