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뀜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1 바이트 제거됨 ,  2012년 7월 14일 (토) 17:43
잔글
2번째 줄: 2번째 줄:     
== 대한청소년개척단 ==
 
== 대한청소년개척단 ==
'''대한청소년개척단'''은 1960년대초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부의 서울 부랑아 분산계획에 의해 서울에 살던 부랑아, 전과자 및 윤락여성 등을 폐농지 및 간척지에 보내 농지의 개간 및 가축사육 등을 통해 갱생을 도모하고 국토개발사업도 수행하려 했던 당시의 개척단 중 가장 대표적인 단체였다.<ref>5.16 쿠데타후 당시의 군사정권 시절에는 대학생도 향토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농활을 가는 등 국토개발을 위한다는 명목의 개척단이라는 이름이 자주 쓰였다. </ref> 1961년 말 서울을 부랑아 7백20여명이 충남 서산군 인지면의 440여정보의 폐염전터를 개척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 그 시작이었다. 초창기에는 주거시설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굴을 파서 생활하기도 했으나, 150여채의 막사를 짓고 생활하면서 돼지, 오리, 닭 등의 가축을 기르고 재봉틀 등의 기술을 배우면서 갱생을 도모하게 되었다. 갱생,자활의 연장선상으로 개척단 축구단도 설립하여 [[실업축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
'''대한청소년개척단'''은 1960년대초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부의 서울 부랑아 분산계획에 의해 서울에 살던 부랑아, 전과자 및 윤락여성 등을 폐농지 및 간척지에 보내 농지의 개간 및 가축사육 등을 통해 갱생을 도모하고 국토개발사업도 수행하려 했던 당시의 개척단 중 가장 대표적인 단체였다.<ref>5.16 쿠데타후 당시의 군사정권 시절에는 대학생도 향토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농활을 가는 등 국토개발을 위한다는 명목의 개척단이라는 이름이 자주 쓰였다. </ref> 1961년 말 서울의 부랑아 7백20여명이 충남 서산군 인지면의 440여정보의 폐염전터를 개척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 그 시작이었다. 초창기에는 주거시설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굴을 파서 생활하기도 했으나, 150여채의 막사를 짓고 생활하면서 돼지, 오리, 닭 등의 가축을 기르고 재봉틀 등의 기술을 배우면서 갱생을 도모하게 되었다. 갱생,자활의 연장선상으로 개척단 축구단도 설립하여 [[실업축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
부랑자들의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100여쌍의 합동결혼식도 행해지고, 이후에도 서울의 시립갱생원에 있던 거지, 부랑아 200명이 추가로 보내지기도 했으나 68년에 이르러서도 한평의 농지도 확보하지 못한 채 폐촌의 위기에 다다르고 말았다. 이후 소식은 불명. <ref>당시 개척단 중에서는 자립개척에 대한 의지는 없으나 결혼식을 미끼로 돈을 갈취하고 정부의 지원금만 받아 먹는 악덕 개척단장도 있을 정도로 부폐도 심했고 성공적인 갱생 케이스도 남지 않아 자연스레 사라져버린 듯</ref>  
+
부랑자들의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100여쌍의 합동결혼식도 행해지고, 이후에도 서울의 시립갱생원에 있던 거지, 부랑아 200명이 추가로 보내지기도 했으나 68년에 이르러서도 한평의 농지도 확보하지 못한 채 폐촌의 위기에 다다르고 말았다. 이후 소식은 불명. <ref>당시 개척단 중에서는 자립개척에 대한 의지는 없으나 결혼식을 미끼로 돈을 갈취하고 정부의 지원금만 받아 먹는 악덕 개척단장도 있을 정도로 부폐도 심했고 성공적인 갱생 케이스도 남지 않아 자연스레 사라져버린 듯</ref>
    
==개척단 축구단 ==  
 
==개척단 축구단 ==  

편집

4,979

둘러보기 메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