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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고보]] 전학이후 이영민은 다양한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23년 여름에는 동경유학생팀과 배재고보팀간의 친선경기에서 하프백(HB)으로 출전하기도 했으며, 경인역전경주대회에서 백기주, 함용화 등과 함께 정상에 올랐다. 1924년 봄에는 제5회 전조선야구대회에서 3번타자로 출전하여 [[휘문고보]]를 22대 2로 격파하며 중학부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가을에는 제5회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센터 하프백(CH)으로 출전해 평양고보를 3 대 0으로 이기며 중등부 우승을 차지했다.<ref>1923년에도 배재고보가 전조선축구대회 중등부 우승을 차지했으나 출전명단에 이영민이 없었다.</ref> 1925년 [[연희전문학교]] 입학 후에도 여전히 [[야구]], [[축구]], [[농구]], [[육상]] 등 다양한 종목에서 활약하였다. 1928년 제3회 조선육상경기대회에서는 400m에서 54초 6의 기록으로 조선 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을 차지했고, [[숭실대학교|숭실전문학교]]와의 제1회 연전-숭전 정기전에서는 농구선수로 출전하여 팀의 주득점자로 활약하면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연희전문 소속으로 전조선야구대회 전문부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고, 전경성대표팀으로 시카고대학 야구 원정팀과 경기를 치루기도 하였다.  1928년 6월 8일  열린 제1회 연전-경성의전 정기전에서 이영민은 370척(呎)짜리(112m) 홈런을 기록하여, [[경성운동장]] 야구장 첫 홈런의 주인공이 되었다. <ref>사실 이영민이 홈런을 기록하기 1년전 일본 투어를 왔던 미국 니그로 리그의 브룩클린 로얄 자이언츠가 1927년 5월 20일 경성운동장에서 식산은행과의 경기를 펼쳤는데 당시 자이언츠 소속의 케디라는 선수가 홈런을 기록한 것이 첫 홈런이다. 이영민선수의 기록은 조선인 최초의 홈런.</ref>
 
[[배재고보]] 전학이후 이영민은 다양한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23년 여름에는 동경유학생팀과 배재고보팀간의 친선경기에서 하프백(HB)으로 출전하기도 했으며, 경인역전경주대회에서 백기주, 함용화 등과 함께 정상에 올랐다. 1924년 봄에는 제5회 전조선야구대회에서 3번타자로 출전하여 [[휘문고보]]를 22대 2로 격파하며 중학부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가을에는 제5회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센터 하프백(CH)으로 출전해 평양고보를 3 대 0으로 이기며 중등부 우승을 차지했다.<ref>1923년에도 배재고보가 전조선축구대회 중등부 우승을 차지했으나 출전명단에 이영민이 없었다.</ref> 1925년 [[연희전문학교]] 입학 후에도 여전히 [[야구]], [[축구]], [[농구]], [[육상]] 등 다양한 종목에서 활약하였다. 1928년 제3회 조선육상경기대회에서는 400m에서 54초 6의 기록으로 조선 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을 차지했고, [[숭실대학교|숭실전문학교]]와의 제1회 연전-숭전 정기전에서는 농구선수로 출전하여 팀의 주득점자로 활약하면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연희전문 소속으로 전조선야구대회 전문부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고, 전경성대표팀으로 시카고대학 야구 원정팀과 경기를 치루기도 하였다.  1928년 6월 8일  열린 제1회 연전-경성의전 정기전에서 이영민은 370척(呎)짜리(112m) 홈런을 기록하여, [[경성운동장]] 야구장 첫 홈런의 주인공이 되었다. <ref>사실 이영민이 홈런을 기록하기 1년전 일본 투어를 왔던 미국 니그로 리그의 브룩클린 로얄 자이언츠가 1927년 5월 20일 경성운동장에서 식산은행과의 경기를 펼쳤는데 당시 자이언츠 소속의 케디라는 선수가 홈런을 기록한 것이 첫 홈런이다. 이영민선수의 기록은 조선인 최초의 홈런.</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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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에는 평양에서 열리는 [[전조선축구대회 (관서체육회)|전조선축구대회]]에는 백기주(당시 배재고보생)와 함께 [[조선축구단]] 소속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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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에는 평양에서 열리는 [[전조선축구대회 (관서체육회)|전조선축구대회]]에는 백기주(당시 배재고보생)와 함께 [[조선축구단]] 소속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며, 1933년 경평축구 정기전에서는 [[경성축구단]] 감독으로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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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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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독립후, 1946년에 열린 도시대항전과 조선-미국 친선야구대회에 출전을 끝으로 조선축구협회 창립 이사와 대한야구협회 초대 이사장직을 역임했으며 국가대표 축구팀 초대 감독에 선임되기도 했다. 사망 이전까지는 대한야구협회 부회장직을 역임했다.
    
=== 죽음 ===
 
===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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