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밖에도 조선정구협회, 조선농구협회, 조선씨름협회, 궁도협회, 여자진흥회 등 각종 체육단체의 고문 및 이사를 역임하는 등 식민지시기 체육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밖에도 조선정구협회, 조선농구협회, 조선씨름협회, 궁도협회, 여자진흥회 등 각종 체육단체의 고문 및 이사를 역임하는 등 식민지시기 체육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
해방이후 1949년 대한운수협회<ref>일제강점기 철도국의 외곽단체인 철도협회의 후신. 해방 후 단체에 일할 때에는 축구협회일을 하지 않았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이 단체의 협회장은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인 [[신익희]]. 독립운동가이자 유명 정치가이지만 축구쪽으로는 문외한인 신익희에게 많은 조언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ref>의 상무를 맡고 있다는 기사외에 한국전쟁 이후의 행적 및 생사 미상.
+
해방이후 1949년 대한운수협회<ref>일제강점기 철도국의 외곽단체인 철도협회의 후신. 해방 후 이 단체에 일할 때에는 축구협회일을 하지 않았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이 단체의 협회장은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인 [[신익희]]. .</ref>의 상무를 맡고 있다는 기사외에 더 이상의 소식이 없으며, 한국전쟁 이후의 행적 및 생사 불명.
== 에피소드 ==
== 에피소드 ==
−
+
* 1929년 신년을 맞아 동아일보가 조선체육계 10년을 회고할 때 [[드리블|몰기]]로 유명하다 하였다. <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901010020922301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9-01-01&officeId=00020&pageNo=23&printNo=3003&publishType=00020 한말전후의 조선체육계 심년이전을 회고 1편] -1929년 1월 1일, [[동아일보]]-</ref>
+
* [[휘문의숙]]의 코치로 있을 때 배재학당과의 라이벌전에서 휘문의숙의 3년간 계속지자 수염난 3학년 만학생으로 속이고 교모를 쓰고 경기에 출전했다가 발각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