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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개척단'''(靑少年開拓團) 또는 '''개척단'''은 60년대초 5.16 군사정부의 부랑아분산계획에 의해 서울에 살던 부랑아를 폐농지에 보내 개척하여 갱생을 하기 위한 단체였다. 여러 개척단중 1963년부터 1965년사이에 축구단을 설립하여 실업축구에 참여했던 개척단은 충남 서산에 있던 '''대한청소년개척단'''(大韓靑少年開拓團)이었다. '''청소년개척단''' 또는 '''개척단 축구단'''으로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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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개척단'''(靑少年開拓團) 또는 '''개척단'''은 60년대초 5.16 군사정부의 부랑아분산계획에 의해 서울에 살던 부랑아를 폐농지에 보내 개척하여 갱생을 하기 위한 단체였다. 여러 개척단중 1963년부터 1965년 사이에 축구단을 설립하여 실업축구에 참여했던 개척단은 충남 서산에 있던 '''대한청소년개척단'''(大韓靑少年開拓團)이었다. '''청소년개척단''' 또는 '''개척단 축구단'''으로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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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청소년개척단 ==
 
== 대한청소년개척단 ==
 
'''대한청소년개척단'''은 1960년대초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부의 서울 부랑아 분산계획에 의해 서울에 살던 부랑아, 전과자 및 윤락여성 등을 폐농지 및 간척지에 보내 농지의 개간 및 가축사육 등을 통해 갱생을 도모하고 국토개발사업도 수행하려 했던 당시의 개척단 중 가장 대표적인 단체였다.<ref>5.16 쿠데타후 당시의 군사정권 시절에는 대학생도 향토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농활을 가는 등 국토개발을 위한다는 명목의 개척단이라는 이름이 자주 쓰였다. </ref> 1961년 말 서울의 부랑아 7백20여명이 충남 서산군 인지면의 440여정보의 폐염전터를 개척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 그 시작이었다. 초창기에는 주거시설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굴을 파서 생활하기도 했으나, 150여채의 막사를 짓고 생활하면서 돼지, 오리, 닭 등의 가축을 기르고 재봉틀 등의 기술을 배우면서 갱생을 도모하게 되었다. 갱생,자활의 연장선상으로 개척단 축구단도 설립하여 [[실업축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한청소년개척단'''은 1960년대초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부의 서울 부랑아 분산계획에 의해 서울에 살던 부랑아, 전과자 및 윤락여성 등을 폐농지 및 간척지에 보내 농지의 개간 및 가축사육 등을 통해 갱생을 도모하고 국토개발사업도 수행하려 했던 당시의 개척단 중 가장 대표적인 단체였다.<ref>5.16 쿠데타후 당시의 군사정권 시절에는 대학생도 향토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농활을 가는 등 국토개발을 위한다는 명목의 개척단이라는 이름이 자주 쓰였다. </ref> 1961년 말 서울의 부랑아 7백20여명이 충남 서산군 인지면의 440여정보의 폐염전터를 개척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 그 시작이었다. 초창기에는 주거시설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굴을 파서 생활하기도 했으나, 150여채의 막사를 짓고 생활하면서 돼지, 오리, 닭 등의 가축을 기르고 재봉틀 등의 기술을 배우면서 갱생을 도모하게 되었다. 갱생,자활의 연장선상으로 개척단 축구단도 설립하여 [[실업축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부랑자들의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100여쌍의 합동결혼식도 행해지고, 이후에도 서울의 시립갱생원에 있던 거지, 부랑아 200명이 추가로 보내지기도 했으나 68년에 이르러서도 한평의 농지도 확보하지 못한 채 폐촌의 위기에 다다르고 말았다. 이후 소식은 불명. <ref>당시 개척단 중에서는 자립개척에 대한 의지는 없으나 결혼식을 미끼로 돈을 갈취하고 정부의 지원금만 받아 먹는 악덕 개척단장도 있을 정도로 부폐도 심했고 성공적인 갱생 케이스도 남지 않아 자연스레 사라져버린 듯</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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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자들의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100여쌍의 합동결혼식도 행해지고, 이후에도 서울의 시립갱생원에 있던 거지, 부랑아 200명이 추가로 보내지기도 했으나 68년에 이르러서도 한평의 농지도 확보하지 못한 채 폐촌의 위기에 다다르고 말았다.<ref>당시 개척단 중에서는 자립 개척에 대한 의지는 없으나 결혼식을 미끼로 돈을 갈취하고 정부의 지원금만 받아 먹는 악덕 개척단장도 있을 정도로 부패도 심했고, 성공적인 갱생 케이스도 없었다.</ref> 결국 정부는 사업 자체에서 손을 떼는 제스쳐를 취하면서, 대한청소년개척단은 자연스레 와해되고 말았다. 이후 청소년개척단을 통해 진행된 간척사업에 대한 보상 문제 등이 국민권익위를 통해 제기되고 있지만, 실효적인 보상 논의는 더이상 진전이 없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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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단 축구단 ==  
 
==개척단 축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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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구성원들의 요구와 민정식 단장의 발의로 청소년개척단 축구단이 창단되어 충남지역 대회에 참가하였다. 이후 1965년 충남 대표선발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충남대표로 전국체전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나, 1965년 말 위의 대한청소년개척단 와해와 더불어 축구단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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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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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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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orts.news.nate.com/view/20151223n21883?mid=s1013&isq=5887 | 김현회 | 박정희 정권의 '사회명랑화사업'과 청소년 개척단]
  
== 같이 보기 ==
 
  
 
== 참고 ==
 
== 참고 ==

2015년 12월 26일 (토) 14:56 판

청소년개척단(靑少年開拓團) 또는 개척단은 60년대초 5.16 군사정부의 부랑아분산계획에 의해 서울에 살던 부랑아를 폐농지에 보내 개척하여 갱생을 하기 위한 단체였다. 여러 개척단중 1963년부터 1965년 사이에 축구단을 설립하여 실업축구에 참여했던 개척단은 충남 서산에 있던 대한청소년개척단(大韓靑少年開拓團)이었다. 청소년개척단 또는 개척단 축구단으로 불리었다.


대한청소년개척단

대한청소년개척단은 1960년대초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부의 서울 부랑아 분산계획에 의해 서울에 살던 부랑아, 전과자 및 윤락여성 등을 폐농지 및 간척지에 보내 농지의 개간 및 가축사육 등을 통해 갱생을 도모하고 국토개발사업도 수행하려 했던 당시의 개척단 중 가장 대표적인 단체였다.[1] 1961년 말 서울의 부랑아 7백20여명이 충남 서산군 인지면의 440여정보의 폐염전터를 개척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 그 시작이었다. 초창기에는 주거시설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굴을 파서 생활하기도 했으나, 150여채의 막사를 짓고 생활하면서 돼지, 오리, 닭 등의 가축을 기르고 재봉틀 등의 기술을 배우면서 갱생을 도모하게 되었다. 갱생,자활의 연장선상으로 개척단 축구단도 설립하여 실업축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부랑자들의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100여쌍의 합동결혼식도 행해지고, 이후에도 서울의 시립갱생원에 있던 거지, 부랑아 200명이 추가로 보내지기도 했으나 68년에 이르러서도 한평의 농지도 확보하지 못한 채 폐촌의 위기에 다다르고 말았다.[2] 결국 정부는 사업 자체에서 손을 떼는 제스쳐를 취하면서, 대한청소년개척단은 자연스레 와해되고 말았다. 이후 청소년개척단을 통해 진행된 간척사업에 대한 보상 문제 등이 국민권익위를 통해 제기되고 있지만, 실효적인 보상 논의는 더이상 진전이 없는 상태이다.


개척단 축구단

1963년 구성원들의 요구와 민정식 단장의 발의로 청소년개척단 축구단이 창단되어 충남지역 대회에 참가하였다. 이후 1965년 충남 대표선발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충남대표로 전국체전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나, 1965년 말 위의 대한청소년개척단 와해와 더불어 축구단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 김현회 | 박정희 정권의 '사회명랑화사업'과 청소년 개척단


참고

  1. 5.16 쿠데타후 당시의 군사정권 시절에는 대학생도 향토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농활을 가는 등 국토개발을 위한다는 명목의 개척단이라는 이름이 자주 쓰였다.
  2. 당시 개척단 중에서는 자립 개척에 대한 의지는 없으나 결혼식을 미끼로 돈을 갈취하고 정부의 지원금만 받아 먹는 악덕 개척단장도 있을 정도로 부패도 심했고, 성공적인 갱생 케이스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