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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영''' (洪德泳, 1926년 5월 5일 ~ 2005년 9월 13일 )은 [[대한민국]] 국적의 축구선수이자 축구인으로,전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이다. | '''홍덕영''' (洪德泳, 1926년 5월 5일 ~ 2005년 9월 13일 )은 [[대한민국]] 국적의 축구선수이자 축구인으로,전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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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남중학교(함흥고등보통학교) 1학년 시절에 축구를 | + | 함남중학교(함흥고등보통학교) 1학년 시절에 축구를 시작하였다. 당시 홍씨의 집은 함흥에서 광문당이라는 서점 겸 체육사를 운영하는 부층이었며, 광문당체육사는 축구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데다, 홍씨의 큰 형님이 [[함흥 축구단]]의 총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축구를 시작할 수 밖에 없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광복 이후 함흥에도 공산화 바람이 불자 서울로 월남하였고, 서울에 터전을 잡은 뒤 [[보성전문학교]]의 입학 시험을 치려고 청량리행 전차를 기다리던 중 보성 재학생들이 "우리 축구는 공격도 수비도 다 좋은데 골키퍼가 약해서 문제란 말이야." 라는 대화를 듣고 골키퍼 포지션을 공략하면 쉽게 합격할 수 있을것이라 생각, 축구부 주장 [[김용덕]]을 찾아가 골키퍼 테스트를 치러 통과했고 더욱이 입학 성적도 우수하였기에 이후 보성전문 축구부에 입단해 활약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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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대학교 졸업 이후<ref>재학중에 보성전문에서 종합대학으로 바뀌며 고려대학교로 교명이 바뀐다. </ref> 잠시 직장인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6.25 동란을 겪으면서 [[조선방직]]에 입단하여 골키퍼로 활약하였다. 이후 [[1954년 스위스 월드컵]]까지 주전 골키퍼로 활약한 뒤, 1956년 봄 현역 선수 생활을 정리한다. 당시 40세가 넘은 나이였음에도 홍선수의 은퇴 소식에 축구계 인사들이 아쉬움을 나타낼 정도로 기량이 빼어났다는 후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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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대표 생활 == | == 국가대표 생활 == | ||
− | [[1948년 런던 올림픽]] | + | [[1948년 런던 올림픽]], 조선 대표팀에 당시 유일한 대학교 선수로 차출되면서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발탁된다. 당시 국가대표 내 막내 겸 후보 선수였기 때문에 출전을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1선발로 낙점돼있었던 [[차순종]] 선수가 연습 경기 도중 허리 부상을 당하자 홍선수가 본선에 출전하게 되었다. 첫 경기에서 멕시코를 5-3으로 꺾으며 8강에 진출했지만, 8강전에서 본 대회 금메달을 차지한 [[스웨덴]]에게 0-12 대패를 내주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ref>홍덕영 선수의 일화 중 푸스카스의 슛을 막느라 가슴에 멍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스웨덴 전의 이야기가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외부링크 참고.</ref> 이후 [[1954년 마닐라 아시안게임]]에 출전, 대한민국의 은메달 수상에 기여하고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의 예선과 본선에 참가, 헝가리전(0-9)과 터키전(0-7)에 출전했던 것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 생활을 마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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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은퇴 이후 == |
− | 고려대학교 | + | 선수 생활 은퇴 이후에는 한국금속제련에 입사하여 직장인 생활을 이어갔으며, 직장을 다니는 틈틈이 국제 [[심판]]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후 모교인 [[고려대학교]]와 [[서울은행]]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1971년에는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킹스컵]] 우승을 이끌어내기도 하는등 감독으로써의 역량도 뽐내었으며, 1985년에는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에도 재임하는 등 축구계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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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 + | 2005년 9월 13일 서울 옥수동 자책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셨으며 9월 15일 서울 아산병원에서 대한축구협회장으로 고인의 장례가 치뤄졌다. 이후 유해는 경기도 파주 동화 경모공원에 안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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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당시에는 [[멀티볼 시스템]]이 아니었기 때문에 경기당 하나의 공만을 가지고 경기를 했는데, 경기중 스웨덴 선수들의 슛팅을 버티다 못한 홍덕영 선수는 공을 잡으면 관중석으로 내질러 버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골킥을 차고 되돌아가 몸을 돌리고나면 이미 공은 스웨덴 선수가 받아서 패널티 에어리어에 와 있었다고...당시 스웨덴의 슛팅은 48개였다고 한다. | * 1948년 당시에는 [[멀티볼 시스템]]이 아니었기 때문에 경기당 하나의 공만을 가지고 경기를 했는데, 경기중 스웨덴 선수들의 슛팅을 버티다 못한 홍덕영 선수는 공을 잡으면 관중석으로 내질러 버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골킥을 차고 되돌아가 몸을 돌리고나면 이미 공은 스웨덴 선수가 받아서 패널티 에어리어에 와 있었다고...당시 스웨덴의 슛팅은 48개였다고 한다. | ||
− | * 은퇴 이후에 잠시 직장 생활을 하였지만 직장에 축구선수 출신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 + | * 은퇴 이후에 잠시 직장 생활을 하였지만 직장에 축구선수 출신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축구 선수는 무식하다는 편견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4098145] |
− | * 은퇴 이후에 | + | * 은퇴 이후에 국제 심판으로도 활약하였다. [[FIFA]]도 해당 공로를 인정해, 1989년 [[김덕준]], [[김주원]], [[이우현]] 씨와 함께 특별표창기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
* 1996년 12월 [[정남식]],[[민용식]]씨와 함께 축구인을 대표해 2002 월드컵 조직위원으로 임명되었다. | * 1996년 12월 [[정남식]],[[민용식]]씨와 함께 축구인을 대표해 2002 월드컵 조직위원으로 임명되었다. | ||
− | * 2001년 | + | * 2001년 12월 2일 부산에서 있었던 2002년 한,일 월드컵 본선 조추첨에 추첨자로 탤런트 송혜교씨가 선정되어 축구팬들의 빈축을 샀을 당시, [[차범근]]씨와 함께 홍덕영씨가 추첨자로 선정되었으면 모양새가 좋지 않았겠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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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5082970348 [손주에게 들려주는 광복 이야기] 첫 올림픽·월드컵 수문장 홍덕영씨] | *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5082970348 [손주에게 들려주는 광복 이야기] 첫 올림픽·월드컵 수문장 홍덕영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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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문헌 == | == 참고 문헌 == | ||
* 한국축구 100년사(증보판) 218P~219P | * 한국축구 100년사(증보판) 218P~219P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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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 == 참고 == |
2017년 1월 23일 (월) 14:32 판
홍덕영 (洪德泳, 1926년 5월 5일 ~ 2005년 9월 13일 )은 대한민국 국적의 축구선수이자 축구인으로,전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이다.
프로필
지도자 프로필
유소년 생활함남중학교(함흥고등보통학교) 1학년 시절에 축구를 시작하였다. 당시 홍씨의 집은 함흥에서 광문당이라는 서점 겸 체육사를 운영하는 부층이었며, 광문당체육사는 축구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데다, 홍씨의 큰 형님이 함흥 축구단의 총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축구를 시작할 수 밖에 없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광복 이후 함흥에도 공산화 바람이 불자 서울로 월남하였고, 서울에 터전을 잡은 뒤 보성전문학교의 입학 시험을 치려고 청량리행 전차를 기다리던 중 보성 재학생들이 "우리 축구는 공격도 수비도 다 좋은데 골키퍼가 약해서 문제란 말이야." 라는 대화를 듣고 골키퍼 포지션을 공략하면 쉽게 합격할 수 있을것이라 생각, 축구부 주장 김용덕을 찾아가 골키퍼 테스트를 치러 통과했고 더욱이 입학 성적도 우수하였기에 이후 보성전문 축구부에 입단해 활약하게 된다.
실업 선수 생활고려대학교 졸업 이후[3] 잠시 직장인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6.25 동란을 겪으면서 조선방직에 입단하여 골키퍼로 활약하였다. 이후 1954년 스위스 월드컵까지 주전 골키퍼로 활약한 뒤, 1956년 봄 현역 선수 생활을 정리한다. 당시 40세가 넘은 나이였음에도 홍선수의 은퇴 소식에 축구계 인사들이 아쉬움을 나타낼 정도로 기량이 빼어났다는 후문.
국가대표 생활1948년 런던 올림픽, 조선 대표팀에 당시 유일한 대학교 선수로 차출되면서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발탁된다. 당시 국가대표 내 막내 겸 후보 선수였기 때문에 출전을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1선발로 낙점돼있었던 차순종 선수가 연습 경기 도중 허리 부상을 당하자 홍선수가 본선에 출전하게 되었다. 첫 경기에서 멕시코를 5-3으로 꺾으며 8강에 진출했지만, 8강전에서 본 대회 금메달을 차지한 스웨덴에게 0-12 대패를 내주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4] 이후 1954년 마닐라 아시안게임에 출전, 대한민국의 은메달 수상에 기여하고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의 예선과 본선에 참가, 헝가리전(0-9)과 터키전(0-7)에 출전했던 것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 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이후선수 생활 은퇴 이후에는 한국금속제련에 입사하여 직장인 생활을 이어갔으며, 직장을 다니는 틈틈이 국제 심판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후 모교인 고려대학교와 서울은행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1971년에는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킹스컵 우승을 이끌어내기도 하는등 감독으로써의 역량도 뽐내었으며, 1985년에는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에도 재임하는 등 축구계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다.
별세2005년 9월 13일 서울 옥수동 자책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셨으며 9월 15일 서울 아산병원에서 대한축구협회장으로 고인의 장례가 치뤄졌다. 이후 유해는 경기도 파주 동화 경모공원에 안장되었다.
에피소드
같이 보기
외부 링크
참고 문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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