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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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년 5월 14,15 양일간 [[경성운동장]]에서 {{주석|조선축구협회 주최, [[조선중앙일보]] 후원|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이 조선축구협회의 회장인 여운형이었으니 사실은 혼자서 북치고 장구쳤다.}}으로 열렸다. 관람료는 성인 30전, 학생 20전. 평양에서 [[평양축구단]], [[고려축구단]], 경성에서 [[서울축구단]], [[경성축구단]] 총 4팀이 출전 신청을 하였으나 고려축구단과 서울축구단이 기권하여, 평양축구단과 경성축구단의 결승전이 열렸다. 후반 20분 경축 채금석의 어시스트를 배종호가 골로 연결하여 1 대 0 으로 경성축구단이 우승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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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1일 (금) 13:24 판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 全朝鮮蹴球選手權大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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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일제강점기 조선 |
설립 연도 | 1935년 |
리그 폐지 | 1940년 |
최다 우승 | 보성전문 (3회 우승) |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全朝鮮蹴球選手權大會)는 1935년~1940년에 조선축구협회의 주최로 열렸던 축구대회이다. 주로 4~5월경 열려 10~11월에 열렸던 전조선축구대회와 함께 일제강점기 양대 축구대회였으나, 일본축구협회가 주최하는 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현, 덴노배)의 조선예선으로써 기능하였기 때문에 조선신궁대회와 마찬가지로 큰 의미를 두기 어렵다.
개요
1933년 조선축구협회가 창립된 이후에도 최고 권위의 전조선축구대회는 계속해서 조선체육회의 주최로 운영되었으며, 1934년부터 전조선종합경기대회의 일부로 편입된 상황이라 조선축구협회는 전만주축구단, 동경유학생, 영,불함대축구팀 등 과의 교류전 정도만 주최하는 형편으로 전조선의 축구계를 대표하는 위상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다시 축구가 부활함에 따라 당시 대일본축구협회(현 일본축구협회)가 올림픽 출전에 대한 강화책으로 올림픽 대표선발을 의미도 다소 포함된 제1회 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15회 덴노배)를 메이지신궁경기대회와 분리하여 개최하게 됨에 따라 그 조선예선으로써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가 개최되게 되었다.
1회 (1935년)
1935년 5월 14,15 양일간 경성운동장에서 조선축구협회 주최, 조선중앙일보 후원?으로 열렸다. 관람료는 성인 30전, 학생 20전. 평양에서 평양축구단, 고려축구단, 경성에서 서울축구단, 경성축구단 총 4팀이 출전 신청을 하였으나 고려축구단과 서울축구단이 기권하여, 평양축구단과 경성축구단의 결승전이 열렸다. 후반 20분 경축 채금석의 어시스트를 배종호가 골로 연결하여 1 대 0 으로 경성축구단이 우승했다.
2회 (1936년)
3회 (1937년)
4회 (1938년)
5회 (1939년)
같이 보기
참고
- ↑ 축구계의 혁신을 위하야 최강팀을 편성하자! 상 -1935-04-01,동아일보-,
축구계의 혁신을 위하야 최강팀을 편성하자! 하 -1935-04-01,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