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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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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대표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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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대표 시절 ==
[[홍익대]] 재학시절부터 드리블과 슈팅 능력만으로 대학권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통했던 선수였다. 풀타임을 소화할 체력이 안돼 주로 조커로 기용되었으나, 조커로 기용됨에도 각급 대회에서 득점 수위권을 놓치지 않았다고. 청소년대표 발탁 이후, 1998년 U-19 아시아 청소년선수권에서는 [[이동국]], [[김은중]] 투톱에 밀려 그다지 중용되지 않았으나, 아시아청소년선수권 우승 직후, [[박창선]] 청소년대표 감독이 선수선발 과정에서 뇌물 수수 혐의가 적발되면서 불구속 입건되고, 신임 [[조영증]] 감독이 부임함에 따라 고봉현 선수에게도 기회가 돌아왔다. 그러나, 세계 청소년 월드컵 본선 조별예선에서 조커로 출장한 고선수는 무득점에 그쳤고, 한국 청소년대표팀도 1승 2패로 조별예선 탈락하면서 깊은 인상을 남기는데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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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 재학시절부터 드리블과 슈팅 능력만으로 대학권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통했던 선수였다. 풀타임을 소화할 체력이 안돼 주로 조커로 기용되었으나, 조커로 기용됨에도 각급 대회에서 득점 수위권을 놓치지 않았다고. 청소년대표 발탁 이후, 1998년 U-19 아시아 청소년선수권에서는 [[이동국]], [[김은중]] 투톱에 밀려 그다지 중용되지 않았으나, 아시아청소년선수권 우승 직후, [[박창선]] 청소년대표 감독이 선수 선발 과정에서 뇌물 수수 혐의로 입건되는 사건이 터져버려,<ref>종국에는 무혐의 처리되었다.</ref> 신임 [[조영증]] 감독이 부임함에 따라 고봉현 선수에게도 기회가 돌아왔다. 그러나, 세계 청소년 월드컵 본선 조별예선에서 조커로 출장한 고선수는 무득점에 그쳤고, 한국 청소년대표팀도 1승 2패로 탈락하면서 깊은 인상을 남기는데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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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상으로 인한 시련과 대구 입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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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상으로 인한 시련과 대구 입단 ==
[[김은중]] 선수가 시드니 올림픽 대표에서 부상으로 낙마함에 따라 잠시 김은중 선수 대체 요원으로 올림픽 대표에 선발된 적도 있었던 고봉현 선수는, 2000년 겨울, [[전남 드래곤즈]]와 [[전북 현대 모터스]]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으며 입단 계약을 조율했으나, 입단 테스트를 겸한 연습경기 도중 상대방 선수의 태클로 장기 부상을 당하면서 프로 계약이 불발되고 세간의 관심밖으로 밀려났다. 2002년, 홍익대 졸업 후 실업팀이었던 미포조선에 입단해 재활에 매진한 고봉현 선수는, 실업 연맹전과 [[FA컵]]에서 득점포를 연일 가동하며 몸상태를 끌어올렸고, 2002년 겨울 [[대구 FC]] 창단을 앞두고 추진된 선수단 입단 테스트에 자원, 총 백여명에 달했던 테스트 선수 중 최종 계약 때까지 살아남아 계약금 1억 5천<ref>K리그 계약금은 2005년을 끝으로 폐지되었다.</ref> 연봉 2천만원에 3년 계약으로 대구 FC에 창단 멤버로 입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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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중]] 선수가 시드니 올림픽 대표에서 부상으로 낙마함에 따라 잠시 김은중 선수 대체 요원으로 올림픽 대표에 선발된 적도 있었던 고봉현 선수는, 2000년 겨울, [[전남 드래곤즈]]와 [[전북 현대 모터스]]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으며 입단 계약을 조율했으나, 입단 테스트를 겸한 연습경기 도중 상대방 선수의 태클로 장기 부상을 당하면서 프로 계약이 불발되고 세간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2002년, 홍익대 졸업 후 실업팀이었던 미포조선에 입단해 재활에 매진한 고봉현 선수는, 실업 연맹전과 [[FA컵]]에서 득점포를 연일 가동하며 몸상태를 끌어올렸고, 2002년 겨울 [[대구 FC]] 창단을 앞두고 추진된 선수단 입단 테스트에 자원, 총 100여명에 달했던 테스트 선수 중 최종 계약 때까지 살아남아 계약금 1억 5천<ref>K리그 계약금은 2005년을 끝으로 폐지되었다.</ref> 연봉 2천만원에 3년 계약으로 대구 FC에 창단 멤버로 입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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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입단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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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입단 이후 ==
2003년 대구 FC 창단 시즌, 고봉현 선수는 [[박성홍]] 선수와 선발 투톱으로 [[박종환]] 감독에게 낙점되어 선발 요원으로 활약했다. 다만, 풀타임을 소화할 체력은 부족해 으레 후반 중 [[노상래]] 선수와 교체되곤 하였는데, 고봉현 선수와 박성홍 선수는 시즌 내내 도합 2골을 넣는데 그치는 빈약한 활약을 보여 [[박종환]] 감독의 속을 태웠다. 신장 178cm에 불과했던 [[박성홍]]이 최전방에서 장신의 수비수들과 볼경합을 맡고, 신장 183cm의 고봉현 선수가 드리블 돌파와 슈팅을 담당하는 체격과 역할의 부조화가 실패의 요인이었다는 평가. 결국 고봉현 선수는 2003시즌 종료 후 서브 자원으로 밀려났고, 2005시즌 직전, [[산드로]] 선수와 호흡이 좋아 산드로 선수와 주전 투톱으로 낙점되기도했으나, 부상으로 낙마하면서 결국 2005 시즌 종료와 함께 방출되고 말았다. 대구 FC 방출 이후, [[내셔널리그]]의 [[강릉시청 축구단]]에 입단했다는 얘기가 들려오기도 하였으나 그곳에서는 출장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부상 이후 컨디션을 끌어올리는데 실패하고 은퇴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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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대구 FC 창단 시즌, 고봉현 선수는 [[박성홍]] 선수와 선발 투톱으로 [[박종환]] 감독에게 낙점되어 선발 요원으로 활약했다. 다만 장기 부상 여파로 풀타임을 소화할 체력은 부족해 으레 후반 중 [[노상래]] 선수와 교체되곤 하였는데, 고봉현-박성홍 콤비는 시즌 내내 도합 2골을 넣는데 그쳐 [[박종환]] 감독의 속을 태웠다. 신장 178cm에 불과했던 [[박성홍]]이 최전방에서 장신의 수비수들과 볼경합을 맡고, 신장 183cm의 고봉현 선수가 드리블 돌파와 슈팅을 담당하는 체격과 역할의 부조화가 실패의 요인이었다는 . 결국 고봉현 선수는 2003시즌 종료 후 서브 자원으로 밀려났고, 2005시즌 직전, [[산드로]] 선수와 호흡이 좋아 산드로 선수와 주전 투톱으로 낙점되기도했으나, 또다시 부상을 당하며 낙마.. 결국 2005 시즌 종료 후 대구 FC에서 퇴단하였다, 대구 퇴단 후 [[내셔널리그]]의 [[강릉시청 축구단]]에 입단했다는 얘기가 들려오기도 하였으나 출장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찌감치 선수 생활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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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레이스타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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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몸상태가 아님에도 불구, 박종환 감독의 눈에 들어 3년동안 준주전급으로 활동한걸보면 재능은 확실히있는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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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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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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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79년생]][[분류:홍익대학교의 선수]][[분류:미포조선의 선수]][[분류:대구 FC의 선수]][[분류:강릉시청 축구단의 선수]]
 
[[분류:1979년생]][[분류:홍익대학교의 선수]][[분류:미포조선의 선수]][[분류:대구 FC의 선수]][[분류:강릉시청 축구단의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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