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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철강 축구단'''은 1977년 9월 창단된 축구팀으로 1년에 한번 있는 사내 대항전을 위해 대학 및 실업지명에 실패한 무명의 고교축구선수 출신들을 중심으로 실업은퇴를 앞둔 도은낙(전,[[조흥은행]]GK)같은 선수를 플레잉코치로 하여 구성된 직장아마추어팀이다. 창단 후 개최된 1977년 32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첫경기에서 상업은행에 승리를 거두며 이목을 끌었다. 16강전에서는 [[국민은행]]에 2 대 2로 비긴후 [[승부차기]]에서 4 대 3으로 승리하여 신생팀 파란을 주도했으나, 8강에서 중앙대에 1 대 0으로 패하며 분루를 삼켰다.  
 
'''극동철강 축구단'''은 1977년 9월 창단된 축구팀으로 1년에 한번 있는 사내 대항전을 위해 대학 및 실업지명에 실패한 무명의 고교축구선수 출신들을 중심으로 실업은퇴를 앞둔 도은낙(전,[[조흥은행]]GK)같은 선수를 플레잉코치로 하여 구성된 직장아마추어팀이다. 창단 후 개최된 1977년 32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첫경기에서 상업은행에 승리를 거두며 이목을 끌었다. 16강전에서는 [[국민은행]]에 2 대 2로 비긴후 [[승부차기]]에서 4 대 3으로 승리하여 신생팀 파란을 주도했으나, 8강에서 중앙대에 1 대 0으로 패하며 분루를 삼켰다.  
 
      
 
      
이후 모기업인 극동철강이 금호산업으로 바뀜에 따라 1978년 9월 팀명칭도 '''금호산업 축구단'''으로 바꾸었으며, 전직 국가대표 선수였던 [[서윤찬]]씨를 코치로 선임하고 당시 홍콩 세미프로 축구리그에서 활약했던 [[임태주]] 선수를 비롯, [[최호춘]], [[김용관]], [[추종수]] 등을 영입하여 본격적으로 실업축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1979년 3월,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참가하여 신생팀임에도 조별예선 통과를 눈앞에 두며 돌풍을 일으켰으나, 금호산업측이 선수등록이 되지 않은 부정 선수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적발되어 몰수패를 당해 첫 대회 참가를 어이없이 마무리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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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모기업인 극동철강이 금호산업으로 바뀜에 따라 1978년 9월 팀명칭도 '''금호산업 축구단'''으로 바뀌었으며, 전직 국가대표 선수였던 [[서윤찬]]씨를 코치로 선임하고 당시 홍콩 세미프로 축구리그에서 활약했던 [[임태주]] 선수를 비롯, [[최호춘]], [[김용관]], [[추종수]] 등을 영입하여 본격적으로 실업축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1979년 3월,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참가하여 신생팀임에도 조별예선 통과를 눈앞에 두며 돌풍을 일으켰으나, 금호산업측이 선수등록이 되지 않은 부정 선수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적발되어 몰수패를 당해 첫 대회 참가를 어이없이 마무리짓고 말았다.  
    
그러나 대회 참가 후 불과 2달여만인 1979년 5월 금호산업 측이 경영상 부진을 이유로 금호산업 축구단을 해체 결정해버리면서 금호산업 축구단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경남버스 축구단]]([[부산]]), [[동양기계 축구단]]([[마산]])과 더불어 지방실업구단 붐을 일으켰으나 혜성처럼 등장했다 혜성처럼 사라져버린 전설과도 같은팀으로 이제는 거의 아는 사람도 없는 환상속의 팀이 되버렸다.
 
그러나 대회 참가 후 불과 2달여만인 1979년 5월 금호산업 측이 경영상 부진을 이유로 금호산업 축구단을 해체 결정해버리면서 금호산업 축구단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경남버스 축구단]]([[부산]]), [[동양기계 축구단]]([[마산]])과 더불어 지방실업구단 붐을 일으켰으나 혜성처럼 등장했다 혜성처럼 사라져버린 전설과도 같은팀으로 이제는 거의 아는 사람도 없는 환상속의 팀이 되버렸다.
    
[[분류:해체된 축구단]][[분류:부산]]
 
[[분류:해체된 축구단]][[분류: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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