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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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근철.jpg
청대 시절의 김근철

김근철(1983년 6월 24일 ~ 현재)는 대한민국 국적의 수비형 미드필더이다.


프로필[편집]

  • 이름 : 김근철
  • 출생일 : 1983년 6월 24일
  • 신체 조건 : 177cm / 73kg
  • 현 소속팀 :
  • K리그 기록
소속팀 연도 출장 교체 득점 도움 경고 퇴장 자책
Teamlogo dgfc.png 대구 FC 2005 7 7 0 1 0 0 0
Teamlogo gfc.png 경남 FC 2006 25 14 3 3 3 0 0
2007 27 8 1 2 5 0 0
2008 17 4 1 0 3 0 0
2009 5 5 0 0 0 0 0
Teamlogo bifc.png 부산 아이파크 2010 30 15 2 5 8 0 0
2011 6 6 0 0 2 0 0
Teamlogo jdfc.png 전남 드래곤즈 2012 13 11 0 0 2 0 0
통산 (K리그) - 130 70 7 11 23 0 0
K리그 통산 기록은 리그컵 기록 포함. 2014년 8월 1일 기준.


유소년 생활[편집]

1999년 풍생고등학교에 입학 당시부터 초고교급 유망주로 통했다. 1학년 때 전국고교추계연맹전에서 득점왕, 무학기전국고교축구대회 득점왕을 수상하며 고교축구계를 발칵 뒤집어놓더니, 2000년부터는 고교전국선수권, 고교왕중왕전 등 각종 대회 MVP를 독식했으며, 2001년에도 3개 대회 MVP를 석권하는 등, 또래들보다 한 차원 높은 축구를 구사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J리그 진출[편집]

2001년 5월, J리그 주빌로 이와타로의 이적이 확정되었다. 당시 한국 고교생이 J리그로 직행한 것은 전례가 없던일이었기에 계약금도 같은 해 K리그 최대 계약금을 받았던 윤화평의 2억 5천만원을 가뿐히 넘길꺼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고, 최종적으로는 연봉 5억, 주택, 승용차, 통역까지 붙여주는 파격적인 조건에 계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하였다.[1] 이처럼 기대를 받으며 주빌로에 입단한 김근철 선수는 2002 시즌 개막전부터 주빌로 1군 로스터에 이름을 올렸으나, 주빌로는 당시 마에다 료이치료를 전략적으로 육성하는데 혈안이 되있었기에 김근철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결국 김근철은 1경기 교체 출장을 기록하여 다음 시즌을 기약해야 했다.

2003 시즌 당시 J리그 세컨드 디비전에 등록된 쇼난 벨마레로 1년 임대를 떠났다. 넓은 시야와 감각적인 패스로 플레이메이커 자질을 가감없이 뽐내며 대활약,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하였다. 시즌 종료후 본인은 주빌로 복귀를 희망했으나, 오히려 주빌로는 쇼난 벨마레로의 완전이적을 확정지으면서 김근철을 외면했다. 김근철은 쇼난 벨마레와의 계약 협상에서 '2004시즌 벨마레가 J리그로 승격이 불발된다면 팀을 떠나겠다' 는 조건을 추가한 1년 계약서에 서명했고, 시즌 종료 후 벨마레가 승격에 실패하자 미련없이 계약 연장을 포기하고 국내 복귀를 모색했다. 벨마레에서 그가 남긴 기록은 78경기 출장 4골 9도움이었다.


K리그[편집]

대구 입단 과정[편집]

벨마레에서 활약하던 2003년에도 한국 청소년대표에 잠깐 차출되었으나, 같은 이유로 고배를 마신 적이 있는 김근철이었다. 그리고 몸값도 지나치게 높아 K리그 클럽들은 그를 외면했다. 그런 그를 영입할 의사를 비친 곳은 박종환대구 FC였고, 경쟁자가 없는 상황에서 김근철을 영입하며 중원을 보강하는 데 성공했다. 계약기간은 1년.

대구 시절[편집]

우여곡절 끝에 대구에 입단한 김선수를, 몇번 기용해 본 박종환 당시 대구 FC 감독의 평가는 냉정했다. 인용하자면,


근철이 같은 경우는 볼을 잘 차. 그런데 본인이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순발력과 수비력이 부족해. 또 볼을 논스톱으로 처리할 때 해야하고, 1:1 할 때 해야하고, 2:1 패스를 통해 돌파할 때 해야하는 것이 축구인데, 그게 적응이 안 됐어. 혼자 축구를 하려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아직까지 우리 팀에 적응이 안 됐지. 그거 고치려면 힘들어. 본인도 힘들어 하고 있고.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축구, 아니 한국축구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빨리 고쳐야 해. 감각은 분명히 있는 애거든.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미드필더로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항상 근철이한테 강조하고 있는데, 본인도 노력하고 있어.


플레이메이커 성향이 강했고 스스로 공간을 뚫어내기엔 몸싸움이나 스피드가 부족했던, 현대 축구의 흐름과 상반되는 능력의 불균형이 김근철 선수의 최대의 약점이었다는 것이다. 박종환 감독은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김근철 선수에게 공격형 미드필더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런 포지션 전환은 한두달의 훈련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김근철 선수의 경우는 전술 훈련에 강도 높은 체력훈련까지 병행해야 했다. 하지만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새로운 역할을 소화하기는 쉽지 않았다. 대구가 보기에 김근철은 역할 변경도 지지부진하고, 만족스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반면 몸값이 너무 높았던 선수였다. 결국 대구는 김근철을 방출하기로 결정하였다.


경남 시절[편집]

대구를 떠난 김근철은 2006년 창단한 경남 FC에 입단했다. 박항서 당시 경남 감독 역시 김근철 선수의 약점을 보완하는데 주안점을 두었으나, 박종환 감독과는 달리 스피드보다는 기술을 향상할 것을 주문했다. 드리블과 개인기를 중점적으로 훈련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찾게 된 김근철은 무서운 속도로 기량을 끌어올렸다.[2] 기량 향상은 그대로 출장기록 증가와 개인 기록 향상으로 이어졌고, 2007 시즌에는 대구 시절 그렇게 소화하지 못하던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도 완벽하게 수행해 내며 경남 중원의 핵심 선수로 자리잡았다. 특히 김효일과의 중원 장악 능력은 리그 최상급으로 평가받았으며 중앙에서의 조직력 극대화는 팀 성적 향상으로 이어져, 경남 FC의 팀 창단 최고 성적인 리그 4위를 이끌었다. [3] 조광래 감독이 부임한 이후에도 김근철에 대한 신뢰는 변함이 없었다. 기존에 김근철의 파트너로 활약한 김효일을 공격형 미드필더로 올리며 전방 압박에 중점을 두고, 스토퍼 이상홍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끌어올려 김근철을 보조할 볼 위닝 미드필더 역할을 맡겨 김근철이 자유롭게 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던 것. 그에 힘입은 김근철은 2008시즌에도 하나은행 FA컵 준우승을 이끌며 팀을 이끌어가는 존재임을 증명했다. 이처럼 경남에서 3년동안 꾸준한 활약을 펼쳐온 그에게 2009시즌은 악몽이었다. 시즌 준비 기간까지만 해도 당연히 중앙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남은 자리를 놓고 이용래, 노용훈 등이 경쟁할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예기치 않은 부상으로 시즌아웃이 되면서 김근철 선수의 입지는 빠르게 좁아져갔던 것. 특히 그의 공백을 이용래, 안상현 선수가 훌륭하게 메워주면서 김근철 선수의 가치는 격감하고 말았다. 결국 주전 경쟁에서 밀린 김근철 선수는 자유계약 대상자로 팀을 떠나고 말았다.


부산 시절[편집]

부산 아이파크는 김근철 선수가 자유계약으로 풀렸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한뒤 곧바로 영입을 시도, 그를 클럽하우스로 불러들였다. 부산 입단 후 유호준과 함께 부산의 중원을 완벽하게 바꾸어 놓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후반기에 들어가면서 체력고갈로 시즌 소화에 애를 먹었다. 2011년 안익수 감독 부임 이후에는 유호준, 박희도 등과 함께 2군행 지시를 받아 충격을 주었다. 유호준이 몸을 끌어올리고, 박희도 역시 출장을 이어가며 군입대를 준비하는 와중에 김근철은 부상으로 통 모습을 드러내지 못 한데다 2군에서도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안익수의 계획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 시즌이 종료된 2011년 11월 김형필과 트레이드되어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하였다.



부산 이후[편집]

당시 전남을 이끌던 정해성은 김근철에게 전진형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기며 전남 미드필더진에 힘을 불어넣어 줄 것이라 기대했으나 김선수의 활약은 미비했다. 결국 정해성 감독은 2012시즌 도중 전남 감독직을 사임하고 말았고, 뒤를 이어 부임한 하석주 감독은 김근철 선수를 기용하지 않았다. 결국 2012시즌 종료 뒤 전남은 김근철 선수와 계약 해지를 단행하였고, 이후 김선수는 팀을 물색하다 중국 2부리그 팀인 선양 센베이에 입단하면서 K리그 생활을 정리하였다.


해외 생활[편집]

2013년 선양 센베이에서 활동하다, 2014년 태국의 싱타루아 FC로 이적하여 팀의 스타로 활약하였으며, 동년 12월 말 태국 2부리그 팀인 PTT 라용으로 이적하였다고 한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주력은 뛰어나지 않지만 괜찮은 활동량, 넓은 시야와 뛰어난 감각으로 경남의 중원을 이끌었던 선수다. 김효일이 경남 합류해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은 이후에는 좀 더 수비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종종 스토퍼와 동일선상에서 수비를 이끌면서 안정적인 볼 배급으로 경남에 기여하였다. 경남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레지스타로 평가하는 시선도 있다.


에피소드[편집]

  • 김근철이 일본에서 활약하던 당시 일본 대표팀 감독이었던 지코 감독이 일본 국가대표팀에 김근철 선수를 선발하려다 한국 선수라는것을 뒤늦게 알았다는 후문이 있다.
  • 2006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홈 경기에서 볼을 걷어내려던 것이 당시 주심이던 이상용의 안면을 강타해 경남 팬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이 장면은 당시 '근백이헤드샷.gif'라는 이름으로 경남 팬들의 미니홈피를 장식했다. 이 해프닝이 있은 뒤로 몇몇 경남 팬들은 이상용이 주심으로 배정되어 삽질을 하면 '상용아! 근철이 불러올까?' 라며 그들만의 훈훈한 이야기를 만들기도.
  • 경남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경남팬들과 SNS를 통해 자주 소통하는 편. 선수 생활을 가장 오래 한 구단이었기 때문에 본인에게도 특벼란 감정이 있다고 언급해왔다. 최근에는 경남팬들이 자체 제작한 10주년 기념 유니폼에 김근철 선수의 마킹을 한 팬이 SNS에 인증을 하자 10주년 축하 메세지를 남기기도.


경력[편집]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참고[편집]

  1. 출처 : (스포츠조선 - 류성옥 기자) 김근철, K리그 유턴 '부진'...대구FC 입단 재도약 다짐
  2. (OSEN - 박영태 기자) 박항서, "김근철이 기대 이상으로 성장했다"
  3. 다만 6강 플레이오프 첫 경기 상대인 포항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서 연장 접전에도 승부가 나지않아 승부차기 키커로 나섰는데, 이때 뼈아픈 실축을 하였다. 이 때 경남을 잡은 5위 포항은 플레이오프에서 승승장구하여 당해시즌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