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선수 집단 월북사건

풋케위키, 대한민국 대표 축구위키 FootballK WIKI-
칫통 (토론 | 기여)님의 2017년 1월 26일 (목) 20:37 판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대학선수 집단 월북사건이란, 1948년 가을에 벌어진 대한민국 대학 축구 선수 10명[1]이 북한으로 월북한 사건을 말한다.


사건 개요

당시 최정예 대학축구선수들이 조선축구협회 평의원 겸 감사였던 현효섭에 포섭되어 집단으로 월북한 사건이다. 당시 남한에서는 일부 대학 선수들이 잠적하였다는 소문이 파다하였고, 급기야 고려대동국대는 일부 주전이 빠진채 전국체전 서울대표 예선[2]을 치러야 했는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북한의 라디오 방송에서 "남조선 축구대표팀이 정부 수립을 경축하여 펼쳐진 기념 체육대회에 출전했으며 준결승에서 탈락하였다"는 보도를 내면서 이들의 잠적이 월북에 의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월북자 명단

이름 소속팀
이강열, 이범태, 신현수, 이봉우 고려대학교
양준석, 이찬영, 안봉오, 문창욱 연세대학교
이한상, 손덕교 서울대학교
박송림 동국대학교

원인

현효섭은 보성전문 (고려대학교)의 축구 선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고려대학교 선수가 4명으로 연세대학교와 같이 월북자가 제일 많았고, 서울대학교 선수 2명과 동국대학교 선수 1명까지 총 11명이 월북하였다.

당시 이들의 월북 이유를 놓고 설왕설래가 오고갔는데, 개중에는 4명이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대표팀 2차 예비 후보, 2명이 1차 예비 후보였기 때문에, 30대가 대거[3] 올림픽 본선에 출전하고 자신들은 대표팀에서 제외된데에 대한 반발로 월북했다는 설, 양준석과 이강열이 남로당원이어서 이들을 권유하였다는 설, 유럽의 사회주의 국가 원정을 보내준다는 말에 속아서 갔다는 설 등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다만 당시 고려대학교 소속이었던 홍덕영 씨는, 해당 11명이 북한이 아닌 시골의 지역축구대회에 가는줄 알았을 것이라로 추측하기도 했다. 당시 시골에서 축구대회를 열면, 해당 지역 내 사람들로 팀을 구성하여야 하는데 우승 욕심에 서울 선수들을 사서 팀을 구성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고 한다. 서울 선수들도 이런 지역축구대회에 참가하면 받는 대접이 극진하다는걸 알기 때문에, 마다하지 않고 동행했을거라는 것. 대표팀 선발 반발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런던 올림픽대표 선발전에 참가하지도 않은 서울대학교 선수가 2명이나 끼어있는점, 월북 선수 규모가 정확히 11명이라는 점, 포지션 별로 균형감 있게(?) 구성된 점, 월북 후 곧바로 체육대회에 출전하였다는 점에서 홍덕영 씨의 의견이 일견 타당해보이나 정확한 진실은 당사자들만 알고 있을듯..


결과

결국 월북한 11명의 선수들 중 1명[4]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북한에 잔류하였고, 전쟁 후 빨치산으로 내려온 일부가 서울 시내에서 목격되었다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로는 모두 어떻게 되었는지 알길이 없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참고

  • 한국축구 100년사(증보판) 220P~222P
  1. 처음에 넘어간 인원은 11명이었지만, 아래에서 보듯 1명은 남한으로 돌아왔기에 최종 월북한 인원은 10명이었다.
  2. 당시 이 경기를 하기위해 고려대측은 한때 축구부에 적을 두었으나 떠났던 이인환씨를 다시 불러들였고 본래 골키퍼였던 홍덕영씨는 필드로 나서고 빙상선수 전성원씨를 골키퍼로 내세워 연장전끝에 1-0으로 고려대가 승리하였다.
  3. 본선 대표 16명중 11명이 30대 노장이었다. 여기에 대학 선수는 16명 중 홍덕영 1명뿐.
  4. 연세대의 문창욱 선수로 북한 대회에 출전 이후 바로 연대로 돌아와 대학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였으나, 한국전쟁 이후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