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종

박대종(1917년 1월 21일 ~ 1995년 8월 16일)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이자 축구인이다.


선수 시절편집

서울 혜화동 출신으로 효제국민학교, 경성제2고보[1], 배재고보, 보성전문을 나왔으며 보성전문 시절부터 부동의 풀백으로 활약하였다. 보성전문을 나온 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해로 건너갔으며 여기서 현정주 씨의 도움을 받아 이시동, 위혜덕, 정용수, 정국진, 전유량, 이혜봉 씨 등과 함께 조선인 축구단을 만들어 활동하셨다고 한다. 광복 후에는 고국으로 귀국, 김용식 씨의 권유로 조선전업에 입단하였으며 국가대표에 발탁돼 광복 후 첫 대외 원정이었던 1947년의 상해 원정을 시작으로 1948년 런던 올림픽 본선, 홍콩 원정, 동남아 순회 원정 등에 빠짐없이 참가하였으며 6.25 사변 중에도 조선방직 소속으로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대표팀 멤버에까지 이름을 올리며 활동을 이어가다, 선수 생활을 정리하였다.


지도자 시절편집

선수 생활 은퇴 후, 고려대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아 차범근, 황재만, 박성화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을 조련했으며 1964년에는 대한민국 청소년대표팀 감독직을 맡아 AFC U-19 챔피언십에 도전하기도 하였다. 지도자 생활 이외에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다.


은퇴 이후편집

에피소드편집

  • 애국지사 박승환[2]의 장손으로도 알려져있다. 때문에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에서 사임한 뒤 1982년부터 1990년까지는 광복회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셨다.


참고편집

  1. 오늘날의 경복고등학교로 박대종 씨는 축구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제2고보에서 배재고보로 전학을 갔다고 한다. 월간축구 1972년 6월호 인터뷰에 따르면, 제2고보에서 정학 처분을 받고 쉬고있던 박씨를 김용식 씨가 찾아와 곧바로 배재고보로 픽업해갔다고 한다. 당시 제2고보에는 축구부가 없었고 배재고보에는 당대 최강 축구부가 있었으니 박씨는 그 제의를 두말할 것 없이 수락하셨다고.
  2. 1907년 한일신협약 비밀각서에 의해 대한제국군 군대가 해산될 당시, 이에 항거하여 자결했던 대한제국군 1대대장으로 어지간한 근현대사 교과서에는 모두 실려있는 분이다.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수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