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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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시절 서윤찬(우)[1]

서윤찬 (1941년 12월 16일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 선수이자 축구인이다.




유소년 시절편집

경남 창녕 출신으로 창녕국민학교, 창녕중학교, 부산상고를 졸업하였다. 당시 창녕에는 변변한 축구팀이 없었고, 더군다나 국민학생 시절 6.25로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비극을 겪은 서씨로써는 제대로 축구 교습을 받을 형편이 못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창녕농고 2학년 재학 도중, 당시 부산상고 코치를 맡고있었던 안종수씨 눈에 들어 부산상고로 전학할 수 있었으며, 이후 부산상고의 붙박이 링커이자 주장으로 2년간 활약하며 본격적으로 축구 선수의 길을 걷게 된다.


성인 선수 시절편집

1964년 12월, 부산상고 졸업을 앞두고 금성방직 축구단에 입단한 서선수는 여기서 김용식 코치의 조련을 받으며 한층 완숙된 기량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 제일모직에 잠시 소속되었다 양지 축구단에 차출되어 활약을 이어갔다. 양지 축구단 해단 이후에는 신탁은행 축구단에 입사했다가, 정병탁 등 다른 선수와 함께 청룡 대표팀에 합류하였으며 1971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하였다. 이후로는 신탁은행 소속으로 1974년까지 활동한 뒤 선수 생활을 정리하였다.


국가대표 시절편집

금성방직 시절부터 대표팀에 이름이 오르내리던 서선수는 양지 축구단에 입단하면서 대표팀의 붙박이 링커로 발돋움, 1966년 아시안게임메르데카배1968년 멕시코 올림픽 아시아예선ㆍ킹스컵1970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예선ㆍ1970년 아시안게임 등 각급 대회에 참가하여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1971년 5월 청룡 대표팀의 일원으로 박스컵 준비에 한창이던차 심장 질환 때문에 더 이상 국가대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이유로[2] 청룡 대표팀에서 퇴단하였으며, 이후 대표팀에서 은퇴하고 말았다.


지도자 시절편집

선수 생활 정리 후, 1975년 부산 동아고등학교 축구부 코치로 부임해 1977년 대통령금배 전국고교축구대회 우승을 거머쥐는 성과를 거두었으며[3] 이후 동아대학교극동철강 등 부산권 축구팀에서 코치 생활을 하며 활발한 지도자 경력을 이어가다 1991년 동아고 축구부 감독직을 내려놓으면서 지도자 생활도 정리하였다.


이후 근황편집

지도자 생활을 정리한 뒤에는 택시 기사, 요식업 운영 등을 전개하다 2013년 현재는 건설업체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에피소드편집

  • 키가 매우 단신이었던 선수로 알려져있다.[4] 월간축구 70년 10월호에 의하면 162cm 였다고.. 그러나 작은 체구에도 불구, 뛰어난 활동량과 지구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대표팀의 붙박이 링커이자 수비 요원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술ㆍ담배를 일절하지 않고, 어릴적부터 뱀탕을 먹었던게 지구력 강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후문. 특히 대표팀 시절까지도 뱀탕을 즐겨 정강지 선수 등과 함께 뱀탕집을 찾아가 먹곤 했다고 한다.


외부 링크편집

원로 축구인 서윤찬 "그 때 그 슈팅이 골대를 맞지 않았다면 한국축구의 역사는 달라졌다"


참고편집

  1. 왼쪽의 선수는 이회택이다.
  2. 나중에 알고봤더니 서윤찬 선수는 선천적으로 박동 수가 낮은 특이 심장을 갖고 있었다. 이를 당시 의사가 이상 심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오진했던 것. 후에 이영무 선수나 마라토너 이봉주 씨도 비슷한 심장 체질인 것으로 알려졌다. [1]
  3. 이는 동아고 축구부의 첫번째 대통령금배 우승이자 2번째 전국대회 우승 기록이었다.
  4. 때문에 선수 시절 별명이 '돌콩'이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