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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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설기현.jpg
2001년 국가대표 시절 설기현

설기현 (1979년 1월 8일 ~ )은 대한민국의 축구선수이자 축구인으로, 2010년부터 2014년까지 K리그에서 활동한 스트라이커이다.



프로필

  • 이름 : 설기현
  • 출생일 : 1979년 1월 8일
  • 신체 : 187cm / 82kg
  • 국가대표 경력
1998년 AFC U-19 챔피언십 본선 대표
1999년 FIFA U-20 월드컵 본선 대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예선 대표
2000년 북중미 골드컵 대표
2000년 AFC 아시안컵 본선 대표
20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본선 대표
2002년 FIFA 한일 월드컵 본선 대표
2004년 AFC 아시안컵 본선 대표
2006년 FIFA 독일 월드컵 본선 대표
2010년 FIFA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예선 대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A매치 통산 82경기 출전 19득점)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 27경기 출전 10득점)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 12경기 출전 7득점)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 K리그 기록
연도 소속팀 리그 출장 교체 득점 도움 경고 퇴장
2010 Teamlogo psfc.png 포항 스틸러스 K리그 16 4 7 3 0 0
2011 Teamlogo uhfc.png 울산 현대 41 16 7 10 8 0
2012 Teamlogo iufc.png 인천 유나이티드 40 14 7 3 4 0
2013 클래식 26 19 4 4 2 0
2014 7 7 0 0 0 0
통산 K리그 클래식 130 60 25 20 14 0
K리그 통산 기록은 리그컵 기록 포함. 2016년 3월 1일 기준
연맹 공식 DB


지도자 프로필

연도 소속 직책
2015 대한민국 성균관대학교 감독 대행
2016 ~ 현재 감독


유소년 생활

강원도 정선군 출신인 설기현은, 강릉 성덕초등학교, 주문진중학교, 강릉상고 (현 강릉제일고)를 거쳐 광운대학교로 진학하였다. 광운대 시절 이동국, 김은중에 밀려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장신의 공격수로 청소년대표에 발탁되었던바 있다. 이후 1998년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시드니 올림픽대표로 차출되었으며,[1] 이후 국가대표에도 이름을 오르내리며 활약하게 된다.


벨기에 시절

2000년 광운대학교 중퇴 후 대한축구협회의 유망주 해외이적 프로젝트의 대상자로 선정되어 유럽무대에 진출을 모색하였으며[2] 벨기에 주필러리그 팀이던 로얄 앤트워프에 입단테스트 끝에 정식계약을 맺는데 성공하였다. 비슷한 시기 앤트워프를 비롯해 벨기에, 독일 등에 진출 했던 이상일, 남궁도, 신영록 등이 부진을 면치못하다 고국으로 돌아간 것과 달리, 설기현은 악착같이 유럽무대에 적응해내며 첫시즌부터 6경기 연속골 등을 기록하며 00/01시즌 11골을 기록하며 대활약하였다.[3] 이러한 설선수의 활약에 관심을 보인팀은 벨기에리그 최강팀인 RSC 안더레흐트. 결국 안더레흐트는 01/02시즌을 앞두고 이적료 160만 달러, 연봉 30만 달러에 설선수를 영입했다. 안더레흐트에 입성한 설기현은, 벨기에 수퍼컵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데 이어, 팀의 주필러리그 우승에도 기여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당시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유럽에서 주전급으로 활약했던 유일한 선수가 바로 설기현이었다.[4]


잉글랜드 시절

2004년 8월 설기현은 잉글랜드 풋볼 리그 챔피언십의 울버햄프턴 원더러스 FC로 이적하였다. 이적 후 안정된 활약을 해 왔고, 팀 통산 7000호 골을 기록하기도 하였다.하지만 울버햄프턴은 05-06시즌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하여 승격이 좌절되었다. 2006년 7월 프리미어리그로 승격이 확정된 레딩FC에 당시 역사상 최고 이적료로 이적하였다. 레딩으로 이적 후에도 준수한 활약을 보여온 설기현은 당시 감독이던 스티븐 코펠 감독에게 무한한 신뢰를 받아왔다. "경기가 풀리지 않을때는 설기현에게 패스하라."는 말까지 하기도 했으니...

하지만 시즌 중반으로 갈수록 설기현 특유의 부진[5]으로(...) 감독과의 마찰이 잦아진 설기현은 풀럼FC로 이적하게 된다. 이적 초 나름 선발로 활약하였지만 시즌 중반 새로 팀에 부임한 로이 호지슨 감독에게 설기현 선수는 전력 구상에 없었고, 2009년 1월 사우디아라비아 프리미어리그 알 힐랄로 임대이적하였다.[6] 사우디에서 활약한 2009년에는 팀의 크라운 프린스컵 우승과 2008-09시즌 팀의 사우디아라비아 프리미어리그 준우승에 공헌하였다. 하지만 임대 복귀 후 풀럼에서는 여전히 설기현 선수가 설 자리는 없었다. 결국 2010년 1월 풀럼과의 계약을 상호해지하고 포항으로 입단하게 되면서 프로생활 10년만에 국내 무대에서 처음 활약하게 되었다.


K리그

2010년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하며 프로 데뷔 10년만에 K리그에서 뛰게 되었다. 하지만 전반기에는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 전혀 뛰지 못했고, 후반기 스탯은 준수했지만 AFC 챔피언스 리그 8강 對 조바한 전에서 빈 골대에 골을 넣지 못해, 팀의 탈락을 막지 못한 사건이 벌어져 탈락의 원흉으로 꼽히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포항에서의 1년은 썩 만족스럽지 못했고 2010시즌 종료 후, 포항과 연봉 협상 진통 끝에 2011시즌 개막 직전 울산 현대로 이적하여 포항 팬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이후 2011년 울산을 K리그 준우승으로 이끈 뒤 다시 자유계약 대상자로 울산을 떠났고, 연고 선수를 영입하려는 인천 유나이티드의 제의를 받아 인천에 입단하였다. 계약 기간은 2년에 연봉은 3억 5천만원 정도라는듯.

설기현은 함께 입단한 2002년 월드컵 스타 김남일과 함께 인천을 강등권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분투하였다. 대부분의 경기를 선발 출장했으며, 완숙한 플레이를 보여주며 인천팬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같이 뛰는 인천 선수들이 설기현의 플레이를 따라가지 못해서 안타까울 지경이었다는 평을 들었다. 다만 2013시즌에는 허리 부상으로 말미암아 12시즌과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도 23경기를 소화해 4골 4도움을 기록하며, 평균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었는데.. 2014시즌에 접어들면서는 완연한 노쇠화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2015시즌 새롭게 인천의 감독으로 부임한 김도훈은, 주전급 선수들이 대거 빠져나간 상태에서 베테랑인 설 선수의 역할을 기대하며 시즌 구상에 박차를 가했는데.. 15시즌 개막 직전인 3월 초, 설기현 선수는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하여 김도훈 감독 및 인천 팬들을 아연실색케 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지도자 생활과 에피소드 부분 참고.

지도자 생활

자신이 하고 싶은 축구를 위해 코치가 아닌 감독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다고 밝힌 설기현은, 성균관대학교 축구부로부터 감독 오퍼가 들어오자 계약기간이 남은 인천에 은퇴를 통보하고,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대학 축구부 감독이 되기위한 필요 조건인 1급 자격증이 설씨에게는 없는 상태인지라, 정식 명칭은 감독 대행이라고 한다.[7] 이 같은 논란으로 해당 대학과 설씨 모두 비판을 받았던바 있다.


국가대표 경력

광운대 2학년 시절이던 98년 대한민국 U-20 대표팀에 발탁된 설기현 선수는, AFC U-19 챔피언십 조별예선에서 5골을 터뜨리며 주목을 받았고 곧바로 시드니 올림픽대표로 차출되며 엘리트 코스를 밟기 시작했다. 다만 이 시절에는 약체 팀과의 경기에서는 잘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득점포를 침묵해 새가슴이란 악평을 듣기도했다. 여기에 2000년 8월 척추뼈 골절상을 당해 시드니올림픽 본선무대에 참가하지 못했고, 2001년까지 국가대표에서는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이대로 설기현이란 이름이 잊혀지는듯도 했다. 하지만 2002년 FIFA 한일 월드컵에서 설기현 선수는 그야말로 날아오르며 반등에 성공하기에 이른다.


플레이 스타일

A매치만 83경기를 소화한 베테랑 선수로 주 포지션은 윙 포워드다. 정확한 크로스와 날카로운 중거리슛이 강점인 선수. K리그로 온 이후에는 기복있는 플레이를 보여줘 기대치에 비해서는 활약도가 낮은건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기대치에 비해서'이며 2시즌간 12골 13도움을 기록했다. ㄷㄷㄷ 이 정도면 리그 최정상급 윙 포워드. 다만 연봉도 국내에서 최정상급으로 받고있다. 인천 이적후에는 원톱에서 스트라이커, 주로 타겟맨 역할을 하여 직접 골을 노리기 보다 공중볼을 받아서 다른 선수에게 연결해 주는 역할 또는 측면으로 빠져서 크로스를 올려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때문인지 생각보다 득점은 많지 않은 편.


에피소드

  • 2006년 5월 세네갈과의 A매치 경기 중 상대 미드필더의 강한 압박에 밀려 공을 내주지 않기 위해 수비진 쪽으로 드리블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 장면을 캡쳐해 '설기현 역주행'으로 이름 붙이며, 설기현 선수를 까는 소재로 사용되었다. 사실 주위에 패스를 받아줄 동료 선수가 없었기 때문에, 설선수는 볼 점유를 가져가면서 상대방의 압박에서도 벗어나기위해 영리한 플레이를 한 것에 가까웠다. 그런 정황에 대한 고려없이 해당 장면만 캡쳐, 편집돼 설선수 까임소재로 사용된 셈.
  • 유럽에서 뛰던 시절, 이상할 정도로 팀 복이 없다는 평을 들었다. 안더레흐트레딩 시절 설기현은 팀에서 에이스급에 속할 정도로 꽤 출중한 실력을 보여줬었지만, 조금만 부진하면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과도하게 내쳐지는 경우가 많았던게 그 예..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국내에 복귀해서는 팀 대우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주전 출장을 강하게 요구하는 모습이 왕왕 비쳐지고 있다.
  • 2012년 11월 18일 40라운드 대전과의 홈 경기에서 정당한 볼 경합 과정으로 보이는 장면에서 부심이 파울을 선언하자 판정에 불만을 품고 광고판을 맞추려고 찬 공이 하필 잘못 맞아 뜨면서 관중석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빈 관중석으로 날아가 피해는 없었지만 문제는 이 장면이 공중파(OBS)로 생중계 되었고 이와 관련된 보도가 쏟아지면서 설기현 선수도 한바탕 욕을 먹었다.
  • K리그에서 활동하면서 보여준 행적은 성적에 비해 잡음이 많았다. 포항ㆍ울산ㆍ인천까지 팀을 옮기는 과정에서, 연봉 등 계약조건 문제로 항상 난항을 겪었고, 여기서 더 나아가 포항 및 인천에서는 동계 전지훈련을 모두 마치고 시즌 구상마저 마친 막바지에 급하게 이적ㆍ은퇴를 선언하는 모습을 보여줘, 이전 소속팀들 팬들에게 강한 비판을 받았다.


경력

시즌 소속팀 리그 비고
2000.08 ~ 2001.07 벨기에 로열 앤트워프 벨기에 1부리그
2001.08 ~ 2004.07 벨기에 RSC 안데를레흐트 벨기에 1부리그
2004.08 ~ 2006.07 잉글랜드 울버햄프턴 원더러스 풋볼 리그 챔피언십
2006.08 ~ 2007.08 잉글랜드 레딩 FC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2007.09 ~ 2009.07 잉글랜드 풀럼 FC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 2009.01 ~ 2009.07 틀:나라자료 사우디아라비아 알 힐랄 사우디 프로리그 임대
2010 Teamlogo psfc.png 포항 스틸러스 K리그
2011 Teamlogo uhfc.png 울산 현대 K리그
2012 ~ 2014 Teamlogo iufc.png 인천 유나이티드 K리그 클래식
선수 생활 은퇴


같이 보기

참고

  1. 올대 시절 아시아예선에서 득점을 성공시키며 두각을 보였으나, 아쉽게도 부상으로 본선 무대는 밟지 못하였었다.
  2. 이 때 설선수를 비롯해 대부분의 유학 선수들을 주먹구구 식으로 유럽으로 보내버려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말 그대로 비행기표만 덜렁 주고 보낸 사례도 있었고 유럽팀이 지급한 계약금과 연봉 등은 유럽 에이전트들이 중간에서 가로채는 사례까지 있었다;; 이 때의 교훈을 발판삼아 2002년 유소년 해외 축구 유학 프로젝트가 정식 출범하여 제대로된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3. 당시 앤트워프 팀내 득점 2위에 랭크되는 활약이었다.
  4. 안정환은 주전이라 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5. 벨기에 시절 허리쪽에 부상을 당한 적이 있는데 그 때문인지 겨울만 되면 부진의 늪에 빠진다..
  6. 국내 최초의 사우디아라비아 프리미어리그로 이적한 경우.
  7. 때문에 공식 경기에서는 설기현 씨가 경기를 지휘할 수 없다는듯. 대신 1급 자격증이 있는 홍도표 코치가 공식 경기 중에는 성대 축구부의 실질적인 감독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관련 기사 : [1]
  8. 관련기사-그 이전 집계에서는 6998골 이였지만 집계상의 오류로 인하여 재집계 하였더니 7000번째골의 주인공이 설기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