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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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성한수.jpg
대전 시절의 성한수

성한수(1976년 3월 10일~)는 대한민국 국적의 축구선수이자 축구인으로, 1999년부터 2004년까지 K리그에서 2005년부터 2007년까지는 내셔널리그에서 활동하였던 공격수이다.


프로필

  • 이름 : 성한수
  • 출생일 : 1976년 3월 10일
  • 신체 : 177cm / 69kg
  • 국가대표 경력
1994년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
1998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1999년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 별명 : 시티헌터


  • 리그 기록
소속팀 리그 연도 출장 교체 득점 도움 경고 퇴장 자책
대전 시티즌 K리그 1999 14 7 4 2 2 0 0
2000 13 11 2 0 3 0 0
2001 12 12 0 0 1 0 0
전남 드래곤즈 2002 7 5 2 0 0 0 0
2003 6 6 0 1 0 0 0
2004 7 7 0 0 0 0 1
창원시청 축구단 KNL 2005 16 15 6 3 1 1 0
2006 13 10 3 1 0 0 0
2007 8 8 0 0 0 1 1
통산 K리그 - 59 48 8 3 6 0 1
KNL - 37 33 9 4 2 2 0
K리그 통산 기록은 리그컵 기록 포함. 2011년 11월 7일 기준.
연맹 공식 DB

지도자 프로필

연도 소속팀 직책
2008년 ~ 2010년 한민학교 축구부 코치
2013년 ~ 현재 호남대학교 축구부 코치 → 감독대행
2014년 현재 성한수 FC 총감독


유소년 생활

문일고등학교 시절부터 고교권을 뒤흔드는 대형 스트라이커로 이름이 높았다. 성한수의 활약도는 1996년 이동국 선수의 등장 이전까지 가장 충격적인 것이었으며 덕분에 유수의 프로축구팀들도 적극 영입을 검토할 정도였으나 성한수 선수가 주축이 된 1994년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대회 당시 성적 저조로 U-20 월드컵 진출에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일고 소속으로 고교 대회 경기 도중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심판에 폭언을 퍼붓는 사태를 벌이면서 2년간 축구 경기 출장을 금지 징계를 받고 선수 생명 위기를 맞았다.

이런 성한수를 입학시킨 것은 김호곤 감독이 이끄는 연세대학교 축구부였으며 2년의 공백기 이후 연세대 4학년 시절,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1998년 1월,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FIFA 프랑스 월드컵 대비 새해 전지훈련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무서운 새내기로 주목을 받았다.


K리그

1999년 드래프트에 이름을 올린 성한수 선수는 1998년 K리그 최하위팀이었던 대전 시티즌에 1순위로 지명되었다. 당시 축구계는 이구동성으로 성한수 선수가 99시즌 K리그 신인왕을 수상할 것이라 시즌 시작전부터 설레발을 쳤으나, 무릎 부상과 발목 부상이 연달아 찾아오며 99년 데뷔 시즌을 14경기 출장에 그쳤고 신인왕 수상에도 실패했다.. 그러나 그 14경기에서 4골 2도움으로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며 부상만 나으면 대전 시티즌에 큰 힘이 될 것이라 팬들의 기대는 대단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2000년 시즌에는 작년처럼 잠깐이나마 번뜩이는 활약도 보여주지 못한채 무릎 부상 재발로 독일로 재활치료를 떠나고 말았고, 대전 시티즌 프론트의 속은 타들어만 갔다. 결국 2001년도 재활 여파로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하자 구단도 팬들도 성선수를 그저그런 공격수로 잊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대전에서 부진하고 있던 성선수를 주목한 것은 당시 전남 드래곤즈 감독이었던 이회택. 건국대학교 시절의 황선홍 대표팀 발탁을 비롯, 최문식, 노상래, 노병준 등 공격수 발굴에 단연 두각을 나타냈던 이감독은 성한수 선수를 당대 최고급 공격 유망주로 평가했고, 당시 이감독이 전남 드래곤즈K리그 우승을 천명하며 모기업 포스코에 읍소해가며 얻어낸 수십억의 자금력을 앞세워 성한수 선수를 대전으로부터 영입하게 된다. 당시 대전은 2002년 불어닥친 팀 해체 위기로 자금줄이 급했기에, 현금 8억원이라는 거금에 성한수를 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전남으로 이적한 성한수였으나 무릎연골 파열로 또 기나긴 재활의 늪에 빠졌고, 수십억을 쏟아부은 결과물들이 모조리 철저한 실패로 끝나면서 이회택도 불명예 퇴진, 성한수도 이회택 감독 사임과 함께 전남 2군으로 전락 후 2005년 방출되고 말았다.


내셔널리그와 은퇴 후

전남을 떠난 뒤, 2005년 창단된 창원시청 축구단에 입단하며 내셔널리그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분유값이라도 벌어야하지 않겠는가 라는 말을 남기며 2005년 6골 3도움을 올리는등 대활약하였으며, 창원에서 3시즌을 소화한 뒤 2007년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한민학교 축구부 코치를 거쳐, 임관식 감독의 부임을 받아 호남대학교 코치로 활동하였다. 2014년 6월부터는 임관식 씨가 광주 FC 스카우터로 부임하자, 호남대학교 감독 대행을 맡아 지휘중에 있기도.. 대학축구계에서의 지도자 생활과는 별개로, 2014년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딴 성한수 FC를 만들고 유소년 축구계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팀에는 성씨가 총감독 직책을 보유하고 있으며, 창원 시절 동료였던 김훈종 씨가 감독직을, 前 부산교공 선수였던 박민석 씨가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플레이 스타일

에피소드

  • 대전에서 전남으로 이적 당시 성한수의 이적료였던 8억은 당시 K리그 역대 이적료 중 가장 많은 금액이었다.
  • 귀공자 같이 생긴 겉모습과 달리 상당히 성격이 다혈질이었다고 한다. 고교 시절 심판에게 항의한 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연세대학교 시절에도 김호곤 감독의 속을 꽤나 태웠다고.


경력


같이 보기


외부 링크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