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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0일 (일) 20:57 판

파일:신진원.jpg
대전 선수 시절의 신진원

신진원 (1974년 9월 27일 ~ ) 은 1997년부터 2004년까지 K리그에서 활약한 선수이다.



선수 프로필

  • 이름 : 신진원
  • 등록명 : 신진원
  • 생년월일 : 1974년 9월 27일
  • 신체 : 174cm / 63kg[1]
  • 수상 경력
1992년 대통령금배 축구대회 우수선수
1996년 전국대학축구선수권대회 MVP
1997년 K리그 신인왕, K리그 시즌 베스트 11 미드필더 부문 수상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 등번호 : 신인왕 수상 당시 8번[2], 대전 시티즌에서 은퇴 당시에는 14번.
  • K리그 기록
소속팀 연도 출장 교체 득점 도움 경고 퇴장
Teamlogo dhfc.png 대전 하나 시티즌 1997 32 19 6 1 3 0
1998 32 12 8 3 5 0
1999 7 6 1 1 1 0
2000 30 20 1 6 1 1
Teamlogo jdfc.png 전남 드래곤즈 2001 26 20 2 1 2 0
2002 8 8 0 0 1 0
Teamlogo dhfc.png 대전 하나 시티즌 2003 10 10 0 0 0 0
2004 2 2 0 0 1 0
통산 (K리그) - 147 97 18 12 15 0
K리그 통산 기록은 리그컵 기록 포함. 2011년 11월 7일 기준


지도자 프로필

  • 문일고등학교 축구부 코치
  • 성지고등학교 축구부 감독
  • 연세대학교 축구부 코치


설명

대전 시티즌의 창단 멤버이자, 97시즌 K리그 신인왕 수상자[3]이기도 한, 대전 시티즌 초기의 공격을 주도한 추억의 스타 선수다. 전남 드래곤즈를 거쳐 대전에서 2003년 프로 선수 은퇴후[4],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대전 시티즌 입단 이전

신진원 선수는 경기도 구리 토평 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하여, 서울 시흥초등학교, 문일중학교 그리고 문일고등학교를 다녔다. 특히, 문일고등학교 시절부터 팀내 스트라이커이자 플레이메이커로 대활약하였고 각종 대회에서 팀내 최고 득점자는 으레 신진원 선수였다고 한다. 연세대학교로 진학후에는 김호곤 감독에게 조련을 받았다. 당시 김호곤 감독이 이끌던 1990년대 후반의 연세대는 황금의 라인업을 자랑했는데 수비의 장대일, 미들의 서동원, 서기복, 그리고 공격의 신진원, 정상남 까지. 당시 연세대학교의 스쿼드는 대학권에서는 상대할 자가 없었고 실업축구 팀과도 박빙일 정도의 실력을 자랑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연세대 베스트 11의 꼭지점이라 할 플레이메이커와 윙포워드 몫은 으레 신진원 선수의 것이었고, 신진원 선수는 드리블 득점감각 패스 경기운영 어느 방면에서도 최고를 자랑했다. 다만 스피드가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1997년 대전 시티즌이 창단되면서 그 해 드래프트를 신청한 신진원 선수는 무조건 1순위로 대전에 지명될 것이라 여겨졌고 결국 예상대로였다. 1997년 드래프트에서 신진원 선수를 비롯, 서동원 등 연세대 미드필더 졸업 선수들 모두가 대전에 입단하게 된다.


대전 시티즌 입단과 신인왕 수상

대전 시티즌 입단 첫해, 시즌 초반에는 주로 플레이메이커로 뛰었으나, 경기 템포를 조절하고 볼배급을 하는데 미숙함, 체력 부족등 여러모로 미숙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윙 포워드로 포지션을 변경하고 여름 휴식기에서 지옥같은 체력훈련을 소화한 끝에 스피드와 체력을 한껏 끌어올리면서 한차원 다른 선수로 성장하게 된다. 리그 재개후 3경기 연속골을 비롯해서 후반기에만 6골을 쏟아넣어 97시즌 리그 득점 5위에 랭크된 신진원 선수는 신인왕 후보로 급부상한게 당연했다. 당시 신인왕 경쟁은 다른선수도 아닌 같은 대전 시티즌 입단 동기인 김현민 선수와 벌어졌는데, 결과는 '신진원 16표 VS 김현민 15표' 의 아슬아슬한 신진원 선수의 판정승으로 마무리되었다. 김현민 선수는 97시즌 도움 랭크 2위에 라피도 컵대회에서 2골을 기록하는등, 리그 일정 내내 꾸준한 활약을 보였으나, 실업 리그 출신의 중고 신인이라는 점이 약점으로 작용해 아쉽게 분루를 삼켰다. 여기에 K리그 대상 97년 시즌 베스트 11 미드필더 부문에도 신진원 선수가 포함되면서 대전 시티즌 소속으로 첫번째 시즌 베스트 11 선정자가 되는 기록도 남겼다. 이후 대전 소속의 선수가 베스트 11에 선정된 경우는 2003년 이관우 선수가 미드필더 부문을 수상한 경우 외엔 없다.


2년차의 대활약, 찾아온 불운

신인왕을 거머쥐며 화려한 데뷔 시즌을 보낸 신진원 선수는 그 흔하다는 2년차 징크스 마저 무시한채, 2년차부터는 더욱 알토란같은 활약을 선보였다. 98시즌 8골로 팀내 득점 1위[5] 3도움으로 팀내 도움 공동 1위, 32경기 출장으로 최은성 선수와 함께 팀내 최다 출장을 기록하였고, 양발 사용이 가능하고 득점력까지 갖춘 윙 포워드로 98시즌을 풍미하였다. 이미 이때부터 타 프로팀의 신진원 선수 영입 경쟁이 불붙기 시작하였고, 대전 시티즌 측은, IMF 이후 계룡건설 홀로 떠앉은 팀 운영의 어려움으로 신진원 선수를 팔 의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98시즌 종료후 계약 협상이 한창 진행 도중이던 12월, 신선수는 마주오던 지프와 충돌하는 교통사고로 인해 다리 골절상과 무릎 부상을 당해 재활에만 1년이 넘게 걸린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신진원 선수에게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


재활과 복귀 그리고 이적

1999년 전반기 전부와 후반기 대부분을 재활로 보내고 예상보다 조기에 돌아온 신진원 선수는, 리그 막판에 조커로 출장하며 컨디션을 점검하였는데 축구적 센스가 어딜가진 않아, PK로 1골과 도움 1개를 올리며 부활의 가능성을 충분히 점칠수 있었다 .2000년, 컵대회에서 풀타임을 차차 소화하며 기량을 과거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신진원 선수는 그 해 리그에서만 6도움을 몰아치며 리그 도움 6위에 랭크되었고 과거와 달리 플레이도 한층 간결해지면서 공격자 파울로 공격의 맥을 끊는 플레이의 횟수도 훨씬 줄어들어 이전보다 더 노련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불과 2년도 안되는 짧은 시간만에 다시 부활한 신진원 선수의 활약에 그의 몸값은 98시즌 종료 직후때만큼이나 치솟았다. 결국 2000년 12월, 신진원 선수는 이적료 2억 8천만원에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하게 된다. 당시 대전 시티즌의 1년 예산이 30억이 채 안되던 시절에, 3억 남짓한 이적료는 K리그 이적 시장 전체를 통틀어도 상당한 고액이었다.


전남 그리고 대전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 이후 신진원 선수는, 2001시즌 전남에서 주로 조커 역할을 수행하며 감각적인 발리슛으로 결승골을 기록하기도 하는 등, 새팀에 차차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전남 입단 이듬해인 2002년 1월, 교통사고의 휴유증과 무리한 조기 복귀를 위한 재활 감행으로 인한 피로 골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더 이상 프로 선수로 뛰기 어렵다는 판정을 받게 된다. 전남은 어떻게든 재활시켜 신 선수를 활용할 방안을 모색했으나, 결국 2001년 시즌 종료와 함께 방출을 결정한다. 대전 시티즌은 전남에서 방출된 신진원 선수를 영입해, 신 선수는 2년만에 친정팀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때가 2003년 1월의 일이었다.


대전에서의 마무리와 은퇴

2003년 대전 시티즌은 익히 알려진대로 홈승률 65%를 상회하며, 홈관중 점유율 1위, 조밀한 패스축구와 압박 축구로 리그 6위 (18승 11무 15패)에 랭크되며 창단 이후 최고의 성적을 남긴다. 불과 1년전인 2002년, 월드컵 직후 터져나왔던 팀 재정난과 해체설 등의 뒤숭숭한 분위기와 1승 12무 15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겼던 대전의 화려한 변신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대전의 팬이 되었고 또한 감동했다. 그 주역에 신진원 선수의 모습은 없었다. 그러나, 신진원 선수는 이관우 선수의 로테이션 자원으로 10경기를 교체출장하며 대전 시티즌을 창단 시점부터 짊어져왔던 에이스이자 노장 선수로서의 책임감을 다했다. 그리고 2004년 짧았지만 화려했던 그만큼 고통이 가득 배어있는 8년간의 프로 생활을 마무리한다. 대전측에서 은퇴식 없이 끝낸게 약간 아쉽다. 신 선수 본인도 아쉬워하는 대목[6]

정리하자면, 신진원 선수는 팀이 어려운 때에 리더이자 에이스의 역할을 다했고, 팀이 화려하게 비상할 때, 그는 주역은 아니었지만 대전 소속의 선수로서 모든걸 지켜보며 함께 기뻐할 수 있었다. 여기에 대전에서 프로 생활을 마무리 하는 영예도 얻었다. 대전의 역대 에이스[7]들이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숙명, 대전을 떠나 다른 팀에서 활약하며 대전의 적으로 뛸 수밖에 없고 대전에 돌아와 은퇴할 가능성도 낮다는 점 등에서 자유로운 신진원 선수는 이론의 여지없는 대전의 레전드라 호칭할 만하다.


선수 은퇴 이후

은퇴 후 독일 브레멘 유소년에서 코치연수를 받은 뒤, 문일고등학교 코치와 성지고등학교 감독을 거쳐 2008년부터 연세대학교 코치로 활약하였다. K3 서유에 2009년 등록 선수이자 서유 유소년 총감독으로 재직하였으며, 2010년 서유와 연세대 생활을 정리하고 왕선재 감독의 부름을 받아 대전 시티즌의 2군 코치 겸 스카우터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1년 5월, 대전에서 승부조작 파문으로 4명이 구속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또한 성적부진의 이유로 2011년 7월 왕선재 감독이 경질 당하면서, 2011년 7월 4일부터 대전의 감독대행이 되었다. 그리고 포항 스틸러스와의 데뷔전에서 7-0의 대패 및 다음 경기였던 경남 FC와의 경기 1:7 패배등 2경기 연속 7실점한 감독 이란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기록을 세웠다. 안습.. ㅠ 결국 신진원 감독대행의 부진으로 유상철 감독의 선임이 재빠르게 이루어졌고, 이후 대전 시티즌의 코치로 활동하다가 2011시즌 종료 후 강원 FC의 코치로 부임하였다.[8] 그러나 강원에 적응할 새도 없이 2012 시즌 중반 김상호 감독을 비롯한 강원 FC 코칭 스태프가 일괄 정리 됨에 따라 신진원 코치도 계약해지를 당했고, 이후 인천 유나이티드의 스카우터로 부임하여 2015년까지 활동하였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참고

  1. 선수 시절
  2. 대전 시티즌에서 8번은 내력이 있는 번호이다. 8번을 처음 달았던 신진원 선수에 이어 이관우, 데닐손 선수등 한 때 대전을 대표했던 선수들이 모두 이 번호를 달고 뛰었기 떄문. 현재는 김정훈 선수에 이어 이현웅 선수가 2011년 까지 8번을 달고 뛰었다. 2012년 현재는 공번인 상태.
  3. 대전 소속으로 처음으로 K리그 대상 부문 수상자라는 기록도 남김.
  4. K3서유 소속의 아마 선수로 등록되어 뛴 바 있다.
  5. 컵대회를 포함한 기록이다. K리그 득점만 따지면 김은중 선수가 6골로 1위였다.
  6. [1] 신진원 선수 인터뷰중. 참고로 서유는 2009시즌을 끝으로 K3 선수 생활도 정리하고 대전 스카우터로 부임하게된 신진원 선수의 은퇴식을 거행했다
  7. 김은중이나 이관우 , 데닐손등, 물론 이들이 에이스냐는 점에 반론할 사람들도 있을법 하지만..
  8. 덧붙여 신진원 코치가 강원으로 간 반면, 최진철 前 강원 코치가 대전으로 갔으니 코치 트레이드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