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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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세연.JPG
대표팀 시절 이세연

이세연(1945년 7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 선수이자 축구인이다.

홍덕영함흥철의 뒤를 잇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수문장으로 6ㆍ70년대를 호령한 것으로 유명하다.



프로필[편집]

  • 이름 : 이세연
  • 출생일 : 1945년 7월 11일
  • 신체 : 175cm / 74kg (선수 시절)
  • 국가대표 경력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아시아예선 대표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예선 대표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1972년 뮌헨 올림픽 아시아예선 대표
1972년 AFC 아시안컵 본선 대표
1974년 서독 월드컵 아시아예선 대표
1966년 ~ 1973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통산 A매치 74경기 출장 50실점)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 지도자 경력
연도 소속팀 직책
1975.7 ~ 1991? 서울신탁은행 코치 → 감독
1983.2 ~ 1983.8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코치
1989 ~ 1990 GK 코치


유소년 시절[편집]

황해도 은율군 출신으로, 1.4 후퇴 당시 남하하여 서울 아현동에 정착한 뒤 강문중 (오늘날의 서울 용문중학교), 한양공고, 경희대학교를 나왔다. 강문중 시절까지 키가 작은 편이었기 때문에 축구 선수가 아닌 핸드볼 선수의 길을 걸었으나, 우연한 기회를 잡아 축구 골키퍼의 길을 걷기에 이른다. 월간축구 1971년 6월호 인터뷰에 따르면, 중학생 시절 축구를 보고자 서울운동장을 찾아갔는데 우연히 대신고등학교 축구부 벤치 근처에 자리를 잡았고, 대신고 축구부 골키퍼가 부상을 당해 경기 시작 10여 분만에 실려나가는 상황을 봤다고 한다. 당시 대신고에는 후보 골키퍼가 없던 상황, 코치가 난처해하던 차에 이세연 씨가 '나 골키퍼 할 줄 알아요!' 하고 당돌하게 나섰고, 코치가 그를 기용해 경기에 나섰다는 것..[1] 이 때 이세연 씨는 1실점하며 경기를 이기는데는 실패했지만, 당시 대신고 코치가 이세연 선수의 가능성을 직감하고 훈련에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이후 동기 부여를 받은 이세연 씨는 점프력과 유연성을 기르기 위해 기계체조까지 배워가며 연습에 매진, 한양공고에 진학해서는 청소년대표팀에도 발탁될 정도로 기량이 일취월장했고, 경희대학교 시절부터는 본격적으로 국가대표에도 발탁되며 성공 가도를 걷기 시작하게 된다.


성인 선수 시절[편집]

경희대학교 재학 도중, 양지 축구단에 차출되어 군복무를 마친 이세연 씨는 이후 경희대를 졸업하고 서울신탁은행 축구단에 들어갔으며 동시에 청룡 국가대표팀에도 합류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소속팀인 서울신탁은행에서의 생활보다 국가대표 합숙으로 보낸 시간이 더 길었을 정도로 당시 국가대표 붙박이 골키퍼였던 이세연 씨는, 1973년 변호영의 등장과 함께 국가대표 수문장 자리를 놓고 선의의 경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는 1974년 서독 월드컵 최종예선 對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 출장을 변호영 선수에게 내준 뒤로는 국가대표와 인연이 멀어졌으며, 이후 소속팀에 전념하다 1975년 8월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신탁은행 축구단의 코치로 합류하였다. 다만 당시 만성적인 선수 부족을 겪고있던 실업 축구의 사정상, 이세연 씨는 코치임에도 불구 곧잘 실업대회 경기에 출장을 기록하곤 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선수 생활은 197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는 후문..


지도자 시절[편집]

에피소드[편집]

  • 한양공고연세대학교부산 대우 로얄즈 등에서 뛰었던 이승태 선수가 이세연 씨의 친아들이다.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영국 축구 유학까지 다녀오는 등 여러 지원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아버지를 뒤를 이을만큼 성장하지 못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여기에 이세연 씨의 친형인 이세화 씨도 배재고등학교 체육교사로 활동하며 축구부 코치를 역임한바 있다.
  • 국가대표 시절 태국 축구팬들에 의해 구두쇠 골키퍼라는 별명을 얻은바 있다. 즉 킹스컵 대회 당시 태국 팬들이 이세연 선수에게 계속 야유를 퍼붓길래, 경기가 끝나고 기자에게 저게 뭔 소리냐고 물어보니 '구두쇠'라는 뜻이라고 알려주었고, 이게 국내 언론에 알려지면서 이세연 선수의 별명은 자연스럽게 구두쇠로 굳어져 버렸다는 후문.
  • 한일전에 유독 강한 골키퍼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세연 씨 본인도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시는듯 하며.[2] 이와 관련되어 지금도 전설처럼 일화 하나가 전해져 내려올 정도다. 당대 일본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가마모토 구니시게가 이세연만 만나면 쩔쩔매곤 했는데.. 그 이유가, 이세연 선수가 가마모토랑 볼경합을 했다하면 볼을 펀칭하는게 아니라 가마모토의 얼굴을 향해 펀칭을 날려댔기 때문이라는 설이 그것. 다만 이세연 씨 본인은 해당 일화에 대해 가마모토를 험하게(?) 다룬 것은 맞지만 대놓고 얼굴에 펀칭을 날리지는 않았다고 증언하셨다.
  • 국가대표로 활약할 당시, 다른 아시아 국가 선수들과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일례로 당시 말레이시아의 골키퍼였던 조지경 선수는 이세연과 친한 사이였는데, 조지경 선수가 아들을 얻자 이름을 '조세연'이라 지었을 정도였다고.. 이후 조씨는 이세연 씨에게 '내 아들을 너 이름 따서 지었는데, 너의 자식도 내 이름 따서 지으면 안되냐?'고 제의했고, 이를 이세연 씨가 승낙하면서 이씨의 장녀 이름은 '이지경'이 되었다고 한다.[3] 문제는 이름 어감이 좋지 않아, 이지경 씨 본인과 이세연 씨 부인의 불만이 대단했다는 후문….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참고[편집]

  1. 지금 들으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 도 있겠지만, 이 당시만 해도 소위 부정 선수 출전이 매우 흔했다…. 저 유명한 이회택 씨도 영등포공고 소속으로, 고교 대회를 나섰으나 이 때 신분은 부정 선수였고 결국 이를 문제 제기한 상대팀에 의해 영등포공고 축구부에서 쫒겨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을 정도.
  2. 관련 기사 : '해방둥이'이세연 "한일전은 이겨야했던 게 아니라 질 수 없었다"
  3. 관련 기사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