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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3일 (금) 00:22 판

베이브 루스와 기념촬영하는 이영민

이영민(李榮敏, 1905년 12월 1일 ~ 1954년 8월 12일)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대한민국의 스포츠 선수이자 행정가이다. 호는 송운(松雲). 경성운동장 최초의 홈런을 기록한 야구선수이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실질적인 첫 감독이었으며,[1] 육상 400m 신기록을 보유하기도 하였다. 야구계에서는 고교생에게 이영민 타격상을 수여하며, 기념하고 있다.




생애

대구 시절

이영민은 1905년 12월 대구 신마치(新町) 214번지[2]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이영회(李榮會)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0세에 사립 희원학교?에 입학하여 1919년 14세의 나이로 졸업한 후, 9월 1일 계성학교(5년제)에 입학하였다. 학업뿐 아니라 스포츠에도 재능을 보였던 이영민이 처음 중앙무대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22년 제3회 전조선축구대회였다. 학생부에서 경신학교와 경기하게 된 계성학교는 이영민이 골을 기록하는 등 서울팀과 호각의 실력으로 3 대 3 무승부를 이뤘으나 추첨에 의해 패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영민의 활약이 인상깊었는지 당시 기사에 골을 기록한 선수로 이름이 올랐으며,[3] 이러한 중앙무대에서의 활약으로 이듬해 후배 백기주[4]와 함께 배재고보로 스카우트 되어 전학을 가게 되었다.[5]


배재고보 및 연희전문 시절

배재고보 전학이후 이영민은 다양한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23년 여름에는 동경유학생팀과 배재고보팀간의 친선경기에서 하프백(HB)으로 출전하기도 했으며, 경인역전경주대회에서 백기주, 함용화 등과 함께 정상에 올랐다. 1924년 봄에는 제5회 전조선야구대회에서 3번타자로 출전하여 휘문고보를 22대 2로 격파하며 중학부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가을에는 제5회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센터 하프백(CH)으로 출전해 평양고보를 3 대 0으로 이기며 중등부 우승을 차지했다.[6] 1925년 연희전문학교 입학 후에도 여전히 야구, 축구, 농구, 육상 등 다양한 종목에서 활약하였다. 1928년 제3회 조선육상경기대회에서는 400m에서 54초 6의 기록으로 조선 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을 차지했고, 숭실전문학교와의 제1회 연전-숭전 정기전에서는 농구선수로 출전하여 팀의 주득점자로 활약하면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연희전문 소속으로 전조선야구대회 전문부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고, 전경성대표팀으로 시카고대학 야구 원정팀과 경기를 치루기도 하였다. 1928년 6월 8일 열린 제1회 연전-경성의전 정기전에서 이영민은 370척(呎)짜리(112m) 홈런을 기록하여, 경성운동장 야구장 첫 홈런의 주인공이 되었다. [7] 1926년에는 평양에서 열리는 전조선축구대회에는 백기주(당시 배재고보생)와 함께 조선축구단 소속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며, 1933년 경평축구 정기전에서는 경성축구단 감독으로 출전했다.


해방 이후

조선 독립후, 1946년에 열린 도시대항전과 조선-미국 친선야구대회에 출전을 끝으로 조선축구협회 창립 이사와 대한야구협회 초대 이사장직을 역임했으며 국가대표 축구팀 초대 감독에 선임되기도 했다. 사망 이전까지는 대한야구협회 부회장직을 역임했다. 이후 1948년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야구 고문 자격으로 런던 올림픽 한국대표팀[8] 에 합류하였다. 그런데 런던 올림픽 축구 대표팀 감독이었던 박정휘 씨가 건강상의 이유 및 축구협회 내부의 알력 다툼 등[9]을 이유로 감독직을 물러나게 되자, 이영민 씨가 꿩대신 닭 격으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게된다. 런던 출발을 불과 3일여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죽음

그가 불세출의 야구 스타였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딱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바로 여자 관계가 매우 지저분했다는 것이다. 호쾌하고 붙임성이 좋으며, 술이라면 사족을 못 썼던 이영민은 젊은 시절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기생집에 드나들었다. 여기까지라면 그래도 그리 흠이라 할 수 없겠지만, 문제는 결혼한 뒤에도 이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부인은 이화여대에서 정구 선수로 이름을 날리던 이보배였다. 가정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영민은 계속해서 기생집을 찾았으며, 심지어는 그곳에서 만난 여러 기생들을 자신의 첩으로 들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연히 자신의 가정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고, 그게 원인이 되어 1941년, 본처와 이혼했다고 전해진다. 가족들 중에서는 이영민의 셋째아들이 특히나 그런 아버지를 증오했는데,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인해 인근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녔다고 한다. 1954년 8월 12일 새벽, 이미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이영민의 셋째아들 이인섭은 인근 불량배들과 공모하여 아버지의 돈을 노린 강도 행각을 벌이는데, 이때 이영민은 자신의 집에 들어온 불량배들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그들 중 한 명이 쏜 총에 맞고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사후 망우리묘지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가족에 의해 화장되어 이장되었으며 묘터에는 대한야구협회 명의의 표지석만 존재한다.[10]


에피소드

  • 명실공히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다. 김용식 씨와 함께 일제강점기 조선을 대표하는 축구 선수로 성장했던 김영근 씨도 숭실중학 시절 이영민 씨의 플레이를 보고 단박에 반해, 이를 따라하기 위해 매일같이 연습을 반복했다고 한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참고

  1. 정확히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호는 박정휘 씨이나, 1948년 런던 올림픽 참가 직전 이영민 씨로 교체되었다. 즉 실질적으로 한국 축구의 국제 데뷔전을 치른 감독은 이영민 씨인 셈.
  2. 칠곡출생이라는 자료도 있으나 계성고 동문회의 기록이 더 상세하여 이 기록에 따른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11월 14일 서상면과 동상면을 통합하여 대구면(1914년 대구부로 독립)을 설치하고 동명을 일본식으로 전면 개정되면서 서상면 전동,후동지역이 신마치(新町)가 되었으며, 해방후 현재의 대신동이 되었다. 계성고등학교와 서문시장이 모두 대신동에 있다. 참고로 모토마찌(元町)는 북성로(대구역주변), 혼마찌(本町)는 서문로(대구중부경찰서 주변), 무라카미초(村上町)는 향촌동, 우에마찌(上町)는 포정동(경상감영공원), 이치바초(市場町)는 현재의 동산동이다.
  3. 광무하는 응원기 -1922년 11월 25일, 동아일보-
  4. 백기주는 이영민의 계성학교 2년 후배이나 나이는 1살 많았다. 키는 160cm에 불과하나 100m,200m 한국기록을 보유한 단거리 스프린터로 여러 종목에 재능을 보였다. 계성학교부터 배재고보, 연희전문까지 이영민과 동문수학하며 같은 팀에서 활약했으며, 와세다대학 졸업후 평양철도와 평양실업에서 실업야구선수로 생활하며, 서울 식산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이영민과 라이벌이 되기도 했다. 50년대 공군감독과 60년대 성동고 야구부장을 거쳐 대한야구협회 이사등을 역임한 야구원로이나 이영민과 마찬가지로 축구선수로 경평전에 출전하기도 한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2003년 졸.
  5. 고등보통학교라고 해서 대단할 것 같지만 1922년 개정된 조선교육령을 기준으로 고등보통학교는 일본인들이 소학교 졸업후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처럼 식민지 조선의 학생들이 보통학교 졸업후 진학하던 5년제 중등교육기관이었다. (그렇다고 고등보통학교가 요즘의 중고등학교 수준은 아니고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고보를 나온 사람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계성학교는 그에 상응하는 5년제의 동일한 교육 기관이었으므로 진학이 아니라 전학이다. 이영민은 계성학교 3년을 마치고 배재고보로 전학하여, 1923ㆍ4년 2년간 재적 후 1925년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하였다.
  6. 1923년에도 배재고보가 전조선축구대회 중등부 우승을 차지했으나 출전명단에 이영민이 없었다.
  7. 사실 이영민이 홈런을 기록하기 1년전 일본 투어를 왔던 미국 니그로 리그의 브룩클린 로얄 자이언츠가 1927년 5월 20일 경성운동장에서 식산은행과의 경기를 펼쳤는데 당시 자이언츠 소속의 케디라는 선수가 홈런을 기록한 것이 첫 홈런이다. 이영민선수의 기록은 조선인 최초의 홈런.
  8. 당시는 조선대표팀이라고 불리었다.
  9. 조선축구협회가 해체된 후 10년만에 본격적인 축구시합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10년동안 전성기를 보냈던 베테랑 선수층과 이제 전성기가 시작되는 대학 선수층 사이에서 누구를 대표로 선발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알력다툼이 있었는데 축구협회에서는 김용식 등 베테랑 선수위주로 선발하였고 이에 반발하여 대표급 대학선수 10명이 월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