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진

장덕진 (1934년 6월 27일 ~ 2017년 4월 20알) 은 전직 대한축구협회 제31대, 32대 회장이다.


약력편집

대한축구협회 활동편집

국가대표 강화편집

1970년 1월 15일 제 31대[1]대한축구협회장에 취임하였으며, 취임 일성으로 국가대표팀 강화육성을 대한축구협회의 가장 큰 목표로 설정해, 추진하였다. 이후 동년 2월 국가대표 상비군이었던 청룡 국가대표팀백호 국가대표팀을 창설하였다. 이후 최초의 외국인 코치 그래함 아담스 코치의 영입과 국가대표 상비군 전용 숙소 건설 등으로 지속적 투자를 받았던 대한민국 대표팀은 국제 무대에서도 승승장구, 1970년 메르데카배컵 우승, 킹스컵 우승, 아시아게임 금메달을 연거푸 차지하면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다만 청룡 대표팀의 최종 목표였던 1972년 뮌헨 올림픽 본선 진출에는 실패하여 아쉬움을 남겼고, 장덕진 회장의 역작(?)이었던 청룡, 백호 국가대표 명칭도 폐지되고 말았다. 하지만 국가대표 상비군 제도 자체는 존속하여 1990년대 까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근간이 되었다.


축구 보급과 국민체육진흥기금 마련편집

1970년 3월, 1억원에 달하는 축구발전기금을 마련하여 축구 보급을 위해 앞장섰다. 특히 장덕진 회장 스스로 각군부대와 각계기업 및 학교 등을 방문해 축구팀 창설 및 축구화와 축구공 보급에 앞장서 전국적으로 축구팀 수를 크게 증가시키는데도 활약하였다. 주말축구교실, 새마을축구대회, 아마추어 직장인 축구대항전, 조기축구 대항전 등이 생긴 것도 이 때이다. 이후 1971년 영등포 국회의원에 당선된 장덕진 씨는 동료 국회의원들과 1972년 10월 국민체육진흥기금법을 입법화시키는데 성공하고 국민체육진흥재단 설립에도 성공하였다. 이 기금은 우수선수 및 체육지도자 양성 및 후원, 은퇴 스포츠인 생활 보조금, 체육 연구 등에 자금지원을 아끼지않으며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


박스컵 개최와 은행팀 창단 붐 조성편집

1969년 금융단축구협의회 구성과 금융단축구리그 창단도 사실상 장덕진 씨의 공이 컸다.[2] 이후 이벤트성 팀창단에 그칠뻔했던 은행축구단을 유지시키고, 1970년대 한국축구의 근간으로 성장시키는데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장덕진 씨의 공이 절대적이었으며, 이후 1970년 아시안게임 우승 축하연 자리에서, 아시아규모의 국제축구대회를 한국에서 해마다 개최하겠다고 천명해 1971년 5월 박대통령컵쟁탈아시아축구대회 (박스컵) 을 개최, 상설화하는데도 활약하였다.


해외 활동편집

대내적으로 입지를 강화하던 대한민국 축구는, 장덕진 회장이 1970년 아시아축구연맹 부회장으로 피선되면서 대외적으로도 아시아 축구계에서 위세를 신장하게 되었다. 장덕진 부회장의 노력으로 1972년 뮌헨 올림픽, 1974년 뮌헨 월드컵 아시아예선을 한국에서 개최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고, AFC를 넘어 당시 FIFA 회장이었던 주앙 아발란제 등과도 접촉하면서 유수의 브라질 및 유럽 축구팀과 한국대표팀의 친선 경기를 주선하는 등의 성과를 일구어냈다.


대한축구협회 회장 사임편집

1970년 1월부터 1973년 8월까지 정력적으로 활동을 해오던 장덕진 씨는 8월 18일, 농림수산부 차관 발령을 받고 공직에 전념하고자 대한축구협회 회장 사퇴를 선언하였다. 이후 2005년 3월 대한축구협회가 '축구명예의전당' 헌액자 7명을 선정할 당시, 장덕진 전 축구협회 회장의 이름도 많은 추천을 받았으나, 본인의 고사로 헌액 대상에 포함되지는 않으셨다.

별세편집

2017년 4월 20일 별세하셨으며 서울성모병원에서 고인의 장례가 치뤄졌다. 향년 82세


같이 보기편집


참고 사항편집

  1. 조선축구협회 회장을 제외하면 제 25대
  2. 다만 이 때 장덕진 씨는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아니라 대한축구협회 재무이사 이자 재무부 이재국장 직위에 있었다. 재무부의 실세이자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였던 장덕진 씨의 요청에 은행들은 축구팀을 부랴부랴 창단했고, 이 때의 공으로 장씨는 1971년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당선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