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방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풋케위키, 대한민국 대표 축구위키 FootballK WIKI-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1번째 줄: 1번째 줄:
'''조선방직'''(朝鮮紡織)은 일제 강점기 수탈을 목적으로 [[부산광역시|부산]]에 세웠던 방직회사로 해방 후 [[한국]] 최대의 적산기업<ref>적산기업(敵産企業)은 말그대로 적의 생산기업, 즉 일본인 소유의 기업이었다가 해방되면서 이들이 내버려두고 떠난 뒤 국가소유가 되었던 것을 말한다. 당시 적산기업은 별다른 기반산업이 없던 해방 직후 한국 경제 내에서 30%를 차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적산기업은 이후 민간사업가에게 불하되어 [[재벌]]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ref>이었다. 조선방직이 운영하던 '''조선방직 축구단'''은 한국전쟁의 피해를 보지 않아<ref>부산과 대구에 공장이 있어 전쟁 참화를 빗겨갔다.</ref>한국전쟁 중에 창단되어 대구를 중심으로 50년대 초반의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및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남겼다.
+
'''조선방직'''(朝鮮紡織)은 일제 강점기 수탈을 목적으로 [[부산광역시|부산]]에 세웠던 방직회사로 해방 후 [[한국]] 최대의 적산기업<ref>적산기업(敵産企業)은 말그대로 적의 생산기업, 즉 일본인 소유의 기업이었다가 해방되면서 이들이 내버려두고 떠난 뒤 국가소유가 되었던 것을 말한다. 당시 적산기업은 별다른 기반산업이 없던 해방 직후 한국 경제 내에서 30%를 차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적산기업은 이후 민간사업가에게 불하되어 [[재벌]]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ref>이었다. 조선방직이 운영하던 '''조선방직 축구단'''은 한국전쟁의 피해를 보지 않아<ref>부산과 대구에 공장이 있어 전쟁 참화를 빗겨갔다.</ref> 전쟁 중에 창단되어 대구를 중심으로 50년대 초반의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및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남겼다.
  
  
11번째 줄: 11번째 줄:
  
 
=== 조선방직 대구공장(대구방직) ===
 
=== 조선방직 대구공장(대구방직) ===
[[파일:대구_시민운동장.jpg|썸네일|380픽셀|1970년대 대한방직 대구공장(구, 조선방직 대구공장) 및 [[대구시민운동장]]. 운동장 위로 보이는 공장 건물들이 대한방직 공장이다.]]
+
[[파일:대구2공단.jpg|썸네일|380픽셀]]
'''조선방직 대구공장'''은 일제강점기 조선방직이 소유하고 있던 대구 메리야스공장과는 별도의 공장으로 1940년 5월 일본 교토부를 거점으로 일본 제사업계를 양분하는 군시제사(郡是製絲.군제세이시)의 자본에 의해 세워진 '''군시방적'''(郡是紡績,군제보세키) '''대구공장'''이 모태이다. 방적기를 3만5천여추 보유하고 있었으나 해방 직후 화재로 전소되었다. 미군정에 적산으로 접수되어 불타버린 설비를 정비하여 1947년 현재의 위치에서 조업을 재개하였으며, 기존 부지에 [[대구운동장|대구시민운동장]]이 건립되었다. 1949년 2월 '''대구방적공사'''(大邱紡績公社)로 개칭되었다가 1949년 방직관계사업체 통합분리운영방침에 따라 11월 조선방직에 통합되어 조선방직 대구공장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양 공장은 생산관리가 융합되지 않아 제품원가까지 다를 만큼 독자적으로 운영되다시피 했을 정도로 경영상 비효율적이었다. 이처럼 독자 운영되다시피 했으므로 조선방직 대구공장이라는 정식명칭 외에 '''대구방적''', '''대구방직''', '''대구조방''', '''조방대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
'''조선방직 대구공장'''은 일제강점기 조선방직이 소유하고 있던 대구 메리야스공장과는 별도의 공장으로 1940년 5월 일본 교토부를 거점으로 일본 제사업계를 양분하는 군시제사(郡是製絲.군제세이시)의 자본에 의해 세워진 '''군시방적'''(郡是紡績,군제보세키) '''대구공장'''이 모태이다. 방적기를 3만5천여추 보유하고 있었으나 해방 직후인 9월 일본인이 철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후 미군정에 적산으로 접수되어 불타버린 설비를 정비하여 1947년 현재의 위치에서 조업을 재개하였으며, 기존 부지에는 [[대구시민운동장|대구운동장]]이 건립되었다. 1949년 2월 '''대구방적공사'''(大邱紡績公社)로 개칭되었다가 1949년 방직관계사업체 통합분리운영방침에 따라 11월 조선방직에 통합되어 조선방직 대구공장으로 변경되어 운영되었다. 그러나 양 공장은 생산관리가 융합되지 않아 제품원가까지 다를 만큼 독자적으로 운영되다시피 했을 정도로 경영상 비효율적이었다. 이처럼 독자 운영되다시피 했으므로 조선방직 대구공장이라는 정식명칭 외에 '''대구방적''', '''대구방직''', '''대구조방''', '''조방대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결국 방만한 운영구조는 양 공장 모두에 부담이 되었고 특히 사장이 직접 경영하는 부산공장에 비해 상무이사가 경영하는 대구공장의 운영은 더욱 심각했다. 대구공장은 한국전쟁 당시 전화를 빗겨가긴 했으나, 재생 설비와 전쟁시 소개되었던 설비 등을 모아 운영한탓에 설비효율성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ref>참고로 당시 대구공장의 경영을 책임지던 상무이사가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씨였다.</ref> 이후 1955년 2월 대구공장이 따로 분리되었으며, 5월 대한방직에 임대되었다가 8월 7억환에 대한방직 사장이자 자유당의 재정부장이었던 설경동에게 불하되어 '''대한방직 대구공장'''이 되었다. 대한방직 대구공장은 1997년 폐쇄되었으며, 2002년 공장터를 개발하여 현재 침산 푸르지오 1차 아파트와 메가박스 대구점과 [[이마트]] 칠성점이 입주해 있는 쇼핑몰 스펙트럼시티를 건설했다. 스펙트럼 시티에 있는 대한방직 대구사무소에서 아직도 분양중.
+
결국 방만한 운영구조는 양 공장 모두에 부담이 되었고 특히 사장이 직접 경영하는 부산공장에 비해 상무이사가 경영하는 대구공장의 운영은 더욱 심각했다. 대구공장은 한국전쟁 당시 전화를 빗겨가긴 했으나, 재생 설비와 전쟁시 소개되었던 설비 등을 모아 운영한탓에 설비효율성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 <ref>그러나 결국 불하 후 조선방직 부산공장은 망했고 대구공장은 대한방직 대구공장으로 살아남았으니 아이러니. 참고로 당시 대구공장의 경영을 책임지던 상무이사가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씨였다.</ref> 이후 1955년 2월 대구공장이 따로 분리되었으며, 5월 대한방직에 임대되었다가 8월 7억환에 대한방직 사장이자 자유당의 재정부장이었던 설경동에게 불하되어 '''대한방직 대구공장'''이 되었다. 대한방직 대구공장은 1997년 폐쇄되었으며, 2002년 공장터를 개발하여 현재 침산 푸르지오 1차 아파트와 메가박스 대구점과 [[이마트]] 칠성점이 입주해 있는 쇼핑몰 스펙트럼시티를 건설했다. 스펙트럼 시티에 있는 대한방직 대구사무소에서 아직도 분양중.
  
 
== 조선방직 축구단 ==
 
== 조선방직 축구단 ==
 +
[[파일:대구_시민운동장.jpg|썸네일|380픽셀|1970년대 대한방직 대구공장(구, 군시방적/조선방직 대구공장) 및 구 군시방적터에 세워진 [[대구시민운동장]]. 운동장 위로 보이는 공장 건물들이 대한방직 공장이다.]]
 
'''조선방직 축구단'''은 1951년 창단된 실업 축구단이다. 조선방직, 혹은 조방으로 줄여서 불리웠다.<ref>[[1948년 런던 올림픽대표]]였던 [[보성전문]] 출신 [[김규환]]이 1950년 홍콩원정단 대표로 뽑힐 때 조선방직 소속이었다고 기록되어있으나, 그때는 아마추어 선수의 직장 명칭일뿐 조방에 축구단이 존재하던 시기는 아니었다.</ref> 1950년 한국전쟁이 발생한 이후 여기저기로 흩어졌던 축구인들을 규합하고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이 당시 축구인들의 염원이었는데, 사장 강일매의 결단으로 1951년 창단되었다.<ref>이 때의 공로로 강일매는 [[대한축구협회]] 12대 집행부의 부회장이 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강일매는 이승만의 위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전횡한 심복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으나, 축구원로들 사이에서는 계속 축구판이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존재로 기억된다.</ref>  
 
'''조선방직 축구단'''은 1951년 창단된 실업 축구단이다. 조선방직, 혹은 조방으로 줄여서 불리웠다.<ref>[[1948년 런던 올림픽대표]]였던 [[보성전문]] 출신 [[김규환]]이 1950년 홍콩원정단 대표로 뽑힐 때 조선방직 소속이었다고 기록되어있으나, 그때는 아마추어 선수의 직장 명칭일뿐 조방에 축구단이 존재하던 시기는 아니었다.</ref> 1950년 한국전쟁이 발생한 이후 여기저기로 흩어졌던 축구인들을 규합하고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이 당시 축구인들의 염원이었는데, 사장 강일매의 결단으로 1951년 창단되었다.<ref>이 때의 공로로 강일매는 [[대한축구협회]] 12대 집행부의 부회장이 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강일매는 이승만의 위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전횡한 심복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으나, 축구원로들 사이에서는 계속 축구판이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존재로 기억된다.</ref>  
  
이에 전쟁 직전까지 대전방직에서 근무하던 [[1948년 런던 올림픽대표]] 출신 [[박대종]] 씨를 중심으로, [[옥정빈]], [[차순옥]], [[이철]], [[최정민]], [[박일갑]] 등 전쟁 중 이북에서 남하한 축구 선수들이 대거 참가하여 팀을 구성하여, '조선방직 대구공장' 팀명으로 제5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 우승을 차지하였다. 당시 조선방직은 '조선방직 대구공장'과 '(본사의)조선방직' 2팀 모두 출전하여, 나란히 4강에 진출했었다. 본사 조선방직은 4강에서 공군에게 0:2로 패했으며, 결승전에서 대구조방은 공군을 1:0으로 이기면서 우승을 차지한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101000329209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10-10&officeId=00032&pageNo=9&printNo=11087&publishType=00020 30년전의 경향신문 1951년 10월 11~17일] -1981년 10월 10일, [[경향신문]]-</ref> 해당 경기 이후 조선방직 축구단은 대구조방과 1~2명 외에는 선수 구성이 상동하므로 대구조방 축구팀이 본사팀을 제치고 조선방직 대표팀이 되었다 할 수 있다.<ref>여기에 대구방직 바로 옆 블록에 [[대구시민운동장]]이 위치해 있어 선수단을 관리하기도 편했을 것이다.</ref>
+
이에 전쟁 직전까지 대전방직에서 근무하던 [[1948년 런던 올림픽대표]] 출신 [[박대종]] 씨를 중심으로, [[옥정빈]], [[차순옥]], [[이철]], [[최정민]], [[박일갑]] 등 전쟁 중 이북에서 남하한 축구 선수들이 대거 참가하여 팀을 구성하여, '조선방직 대구공장' 팀명으로 제5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 우승을 차지하였다. 당시 조선방직은 '조선방직 대구공장'과 '(본사의)조선방직' 2팀 모두 출전하여, 나란히 4강에 진출했었다. 본사 조선방직은 4강에서 공군에게 0:2로 패했으며, 결승전에서 대구조방은 공군을 1:0으로 이기면서 우승을 차지한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101000329209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10-10&officeId=00032&pageNo=9&printNo=11087&publishType=00020 30년전의 경향신문 1951년 10월 11~17일] -1981년 10월 10일, [[경향신문]]-</ref> 해당 경기 이후 조선방직 축구단은 대구조방과 1~2명 외에는 선수 구성이 상동하므로 조선방직 축구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여기에 군시방적 공장 원래터에 [[대구시민운동장]]이 지어졌으므로 공장과 연습장이 가까워 선수단을 관리하기 편했고 대구공장의 책임자도 [[손기정]]이었으므로 여러므로 부산보다 축구단 운영이 편리했을 것이다.  
 
 
1952년 이후에는 조선방직 팀이란 명칭으로 참가하며 1950년대 초중반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를 비롯해 각종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다투었으나, 1955년 조선방직 대구공장이 대한방직 사장인 설경동 씨에게 불하되고 대구 대한방직 파업 등의 혼란기를 거치며, 축구단은 해체된 것으로 여겨진다.<ref>설경동 씨가 공장을 인수 한 이후 대구공장에 근무하던 2600명을 월급 1달치를 지급하면서 해고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재고용하였으며, 남은 900명의 직원들은 고강도의 노동에 시달렸으므로 처우 개선과 복직을 요구하는 대구 대한방직 쟁의가 일어났다. 이에 관한 파업과 소송은 1960년 4.19 이후에나 해결되었으므로 축구단을 꾸려나갈 형편은 아니었던 셈.</ref> 1956년 도시대항 축구대회에서는 조선방직팀이 [[안성]]대표로 출전을 하거나, [[연세대]]와의 친선경기를 펼치기도 했지만 [[전국선수권대회]]의 출장은 1955년이 마지막이었다.
 
  
 +
1952년 이후에는 조선방직팀이란 명칭으로 참가하며 1950년대 초중반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를 비롯해 각종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다투었으나, 1955년 조선방직 대구공장이 대한방직 사장인 설경동 씨에게 불하되고 대구 대한방직 파업 등의 혼란기를 거치며, 축구단은 해체된 것으로 여겨진다.<ref>설경동 씨가 공장을 인수 한 이후 대구공장에 근무하던 2600명을 월급 1달치를 지급하면서 해고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재고용하였으며, 남은 900명의 직원들은 고강도의 노동에 시달렸으므로 처우 개선과 복직을 요구하는 대구 대한방직 쟁의가 일어났다. 이에 관한 파업과 소송은 1960년 4.19 이후에나 해결되었으므로 축구단을 꾸려나갈 형편은 아니었던 셈.</ref> 1956년 도시대항 축구대회에서는 조선방직팀이 [[안성]]대표로 출전을 하거나, [[연세대]]와의 친선경기를 펼치기도 했다는 기사가 있지만 공식적인 출장은 1955년 [[전국선수권대회]]의 출장이 마지막이었다.
  
 
== 주요 선수 ==
 
== 주요 선수 ==

2018년 1월 18일 (목) 03:10 기준 최신판

조선방직(朝鮮紡織)은 일제 강점기 수탈을 목적으로 부산에 세웠던 방직회사로 해방 후 한국 최대의 적산기업[1]이었다. 조선방직이 운영하던 조선방직 축구단은 한국전쟁의 피해를 보지 않아[2] 전쟁 중에 창단되어 대구를 중심으로 50년대 초반의 전국축구선수권대회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남겼다.


조선방직[편집]

조선방직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 일제가 한국에서의 목화의 재배와 매매 및 면사방직과 판매에 대한 영리를 목적으로 1917년 11월 범일동일대에 세운 일본 미쓰이재벌[3]계의 방직회사이다. 1925년 부산공장에서 조면업을 시작하여, 1928년 대구공장 설립 등을 거처, 사리원 및 진남포공장(1933), 원주공장(1934), 대전공장(1935), 안동공장(1936), 춘천공장(1937), 김천공장(1939) 등 철도를 중심으로 공장을 설립하며 조면업을 확장시켜갔다. 1933년 지정공판제의 강화로 인한 재벌자본 중심으로 조면업 개편, 일제의 군수공업화정책에 편승하여 사업을 확장시켜 같은 미쓰이계의 남북면업과 더불어 조선 최대의 조면업체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일본경제의 일부로 작동하던 한국내 공업들은 해방 이후 일본과의 단절로 재생산구조가 붕괴되어 혼란을 겪어야 했으나, 면방직공업만은 예외였다. 대규모 산업시설, 원면 제고 및 원조원면의 원활한 공급, 시장 수요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 가장 먼저 조업을 재개할 수 있었으며, 그 중 조선방직이 단연 돋보였다. 조방은 전국 17개 지역의 모면공장과 2차 가공공장으로 1941년 세워진 대구 메리야스 공장[4]을 보유한 한국 최대의 면방직회사로 미군정의 직접통제하에 들어가 상무부 산하에 방직공장 운영부를 설치하고 귀속방직 공장을 직접관리하다가 정부 수립후 상공부 산하의 기업이 되었다. 1949년 2월에는 상공부 지시에 의해 대구 메리야스 공장을 분리[5]하고 11월에 정부의 방적관계 사업체 통합운영방침에 따라 대구방적공사(구 군시방적)을 흡수 통합하여, 조선방직 대구공장이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 피해가 없이 가동된 방직회사는 조방 부산공장과 조방 대구공장, 삼호방직 뿐이었다. 방적기가 4만여추에 달하는 조선방직에 비해 삼호방직은 1만여추에 불과했기 때문에 조방의 위상은 더더욱 격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인해 정치권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자신과 정치노선이 다른 실업가 김지태에게 경영권이 넘어가는 것을 우려한 이승만이 해당 불하를 취소하고 1951년 9월, 자신의 측근 강일매를 관리인에 임명하였다. 이에 반발한 조방노조가 1952년 파업이 일으켰으나, 이승만은 초지일관 강일매를 지지하였다. 이후 1955년 2월 대구공장의 분리와 동시에 부산공장은 강일매에게 임대되었다가 그 해 8월, 35억환에 강일매에게 불하되었다. 그러나 방만한 경영과 시설 개선에 쓰여야할 자본이 자유당의 정치자금으로 들어가면서 시설의 노후화, 체불임금으로 인한 파업, 불하대금의 연체 등 자금난이 가중되어 불하 3년 만에 불하금의 2배에 육박하는 55억환에 달하는 부채를 지면서 강일매는 몰락하였고 강일매 사후 삼호방직 정재호에게 다시 인수되었으나 결국 막대한 부채를 안은채 1968년 4월 부산시로 넘어가게 되었다. 부산시는 조방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시청 등 각종 공공시설을 이설하여 새로운 도시중심지를 조성하기 위해 그해 5월 1일 범일지구 재개발사업 기공식을 시행하였고 조방은 문을 닫았다. 조선방직은 1969년 7월 법인청산 절차가 종결되면서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조선방직이 있었던 자리에는 부산시민회관, 한양과 삼익아파트, 자유시장, 평화시장과 각종 호텔, 예식장이 들어서 있으며, 현재도 조방 또는 조방앞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6]


조선방직 대구공장(대구방직)[편집]

대구2공단.jpg

조선방직 대구공장은 일제강점기 조선방직이 소유하고 있던 대구 메리야스공장과는 별도의 공장으로 1940년 5월 일본 교토부를 거점으로 일본 제사업계를 양분하는 군시제사(郡是製絲.군제세이시)의 자본에 의해 세워진 군시방적(郡是紡績,군제보세키) 대구공장이 모태이다. 방적기를 3만5천여추 보유하고 있었으나 해방 직후인 9월 일본인이 철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후 미군정에 적산으로 접수되어 불타버린 설비를 정비하여 1947년 현재의 위치에서 조업을 재개하였으며, 기존 부지에는 대구운동장이 건립되었다. 1949년 2월 대구방적공사(大邱紡績公社)로 개칭되었다가 1949년 방직관계사업체 통합분리운영방침에 따라 11월 조선방직에 통합되어 조선방직 대구공장으로 변경되어 운영되었다. 그러나 양 공장은 생산관리가 융합되지 않아 제품원가까지 다를 만큼 독자적으로 운영되다시피 했을 정도로 경영상 비효율적이었다. 이처럼 독자 운영되다시피 했으므로 조선방직 대구공장이라는 정식명칭 외에 대구방적, 대구방직, 대구조방, 조방대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결국 방만한 운영구조는 양 공장 모두에 부담이 되었고 특히 사장이 직접 경영하는 부산공장에 비해 상무이사가 경영하는 대구공장의 운영은 더욱 심각했다. 대구공장은 한국전쟁 당시 전화를 빗겨가긴 했으나, 재생 설비와 전쟁시 소개되었던 설비 등을 모아 운영한탓에 설비효율성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 [7] 이후 1955년 2월 대구공장이 따로 분리되었으며, 5월 대한방직에 임대되었다가 8월 7억환에 대한방직 사장이자 자유당의 재정부장이었던 설경동에게 불하되어 대한방직 대구공장이 되었다. 대한방직 대구공장은 1997년 폐쇄되었으며, 2002년 공장터를 개발하여 현재 침산 푸르지오 1차 아파트와 메가박스 대구점과 이마트 칠성점이 입주해 있는 쇼핑몰 스펙트럼시티를 건설했다. 스펙트럼 시티에 있는 대한방직 대구사무소에서 아직도 분양중.

조선방직 축구단[편집]

파일:대구 시민운동장.jpg
1970년대 대한방직 대구공장(구, 군시방적/조선방직 대구공장) 및 구 군시방적터에 세워진 대구시민운동장. 운동장 위로 보이는 공장 건물들이 대한방직 공장이다.

조선방직 축구단은 1951년 창단된 실업 축구단이다. 조선방직, 혹은 조방으로 줄여서 불리웠다.[8] 1950년 한국전쟁이 발생한 이후 여기저기로 흩어졌던 축구인들을 규합하고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이 당시 축구인들의 염원이었는데, 사장 강일매의 결단으로 1951년 창단되었다.[9]

이에 전쟁 직전까지 대전방직에서 근무하던 1948년 런던 올림픽대표 출신 박대종 씨를 중심으로, 옥정빈, 차순옥, 이철, 최정민, 박일갑 등 전쟁 중 이북에서 남하한 축구 선수들이 대거 참가하여 팀을 구성하여, '조선방직 대구공장' 팀명으로 제5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 우승을 차지하였다. 당시 조선방직은 '조선방직 대구공장'과 '(본사의)조선방직' 2팀 모두 출전하여, 나란히 4강에 진출했었다. 본사 조선방직은 4강에서 공군에게 0:2로 패했으며, 결승전에서 대구조방은 공군을 1:0으로 이기면서 우승을 차지한다.[10] 해당 경기 이후 조선방직 축구단은 대구조방과 1~2명 외에는 선수 구성이 상동하므로 조선방직 축구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여기에 군시방적 공장 원래터에 대구시민운동장이 지어졌으므로 공장과 연습장이 가까워 선수단을 관리하기 편했고 대구공장의 책임자도 손기정이었으므로 여러므로 부산보다 축구단 운영이 편리했을 것이다.

1952년 이후에는 조선방직팀이란 명칭으로 참가하며 1950년대 초중반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를 비롯해 각종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다투었으나, 1955년 조선방직 대구공장이 대한방직 사장인 설경동 씨에게 불하되고 대구 대한방직 파업 등의 혼란기를 거치며, 축구단은 해체된 것으로 여겨진다.[11] 1956년 도시대항 축구대회에서는 조선방직팀이 안성대표로 출전을 하거나, 연세대와의 친선경기를 펼치기도 했다는 기사가 있지만 공식적인 출장은 1955년 전국선수권대회의 출장이 마지막이었다.

주요 선수[편집]


우승 기록[편집]


에피소드[편집]

  • 축구 경기 도중 조선방직이 승리하자 열받은 김창룡이 조선방직 책임자를 끌고 갔는데 그 사람이 손기정이었다.라는 에피소드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당시의 기사는 없고 이후 추억하는 내용만 있어 정확한 팩트를 알기 어려우나 아래 두 기사를 비교해 보자. 1951년도에는 특무대가 금방 창단해 4강에도 간적이 없으므로 무리수. 1953년도에는 병참단이 우승을 차지해 무산되지 않았으므로, 무산된 대회인 1952년의 얘기라고 추정. 두 기사를 읽고 판단하시길..
1951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대구방직팀이 우승을 차지하자 특무대 김창룡의 심사가 뒤틀렸다. 그래서 부하를 시켜 대구방적 책임자를 끌고 왔는데 다름아닌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었다. 뒤늦게 그를 알아본 군인들이 사과를 하며 끝났지만 손기정이 아니었다면 ㅎㄷㄷ.[14]
1953년 대구에서 열린 전국축구선수권대회 CIC와 조방의 준결승전에서 제비뽑기로 조방이 승리하자 열받은 김창룡이 지프차를 타고 운동장으로 들어가 조방응원단 모조리 잡아들이라고 호통치자 공포를 쏘면서 운동장이 순간 아수라장으로 돌변, 축협간부들은 숨고, 주심 배종호는 진해로 도망가서 대회 자체가 무산되고, 손기정은 특무대에 잡혀갔다가 특무대 코치 민병대의 주선으로 풀려나고 이 때의 인연으로 CIC육상부를 창설했다.[15]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1. 적산기업(敵産企業)은 말그대로 적의 생산기업, 즉 일본인 소유의 기업이었다가 해방되면서 이들이 내버려두고 떠난 뒤 국가소유가 되었던 것을 말한다. 당시 적산기업은 별다른 기반산업이 없던 해방 직후 한국 경제 내에서 30%를 차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적산기업은 이후 민간사업가에게 불하되어 재벌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
  2. 부산과 대구에 공장이 있어 전쟁 참화를 빗겨갔다.
  3. 미쓰이 자이바츠(三井財閥)는 일제시대 미쓰이은행과 미쓰이물산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재벌로 미쓰비시, 스미모토와 더불어 일본의 3대 재벌(자이바츠)이였다. 종전 후 미군정시기 재벌은 해체되어 느슨한 기업집단이 되었다. 도시바, 미츠코시, 산토리, 도요타자동차도 과거 미쓰이재벌계열사.
  4. 당시 메리야스는 속옷용 원단을 칭했다.
  5. 대구메리야쓰공사라는 이름으로 분리되었다가 1955년 불하되어 내외방직이 되었다.
  6. 조방낙지가 바로 이곳이 원조. 잊혀진 부산역사-조선방직주식회사 부산광역시 홈페이지
  7. 그러나 결국 불하 후 조선방직 부산공장은 망했고 대구공장은 대한방직 대구공장으로 살아남았으니 아이러니. 참고로 당시 대구공장의 경영을 책임지던 상무이사가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씨였다.
  8. 1948년 런던 올림픽대표였던 보성전문 출신 김규환이 1950년 홍콩원정단 대표로 뽑힐 때 조선방직 소속이었다고 기록되어있으나, 그때는 아마추어 선수의 직장 명칭일뿐 조방에 축구단이 존재하던 시기는 아니었다.
  9. 이 때의 공로로 강일매는 대한축구협회 12대 집행부의 부회장이 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강일매는 이승만의 위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전횡한 심복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으나, 축구원로들 사이에서는 계속 축구판이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존재로 기억된다.
  10. 30년전의 경향신문 1951년 10월 11~17일 -1981년 10월 10일, 경향신문-
  11. 설경동 씨가 공장을 인수 한 이후 대구공장에 근무하던 2600명을 월급 1달치를 지급하면서 해고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재고용하였으며, 남은 900명의 직원들은 고강도의 노동에 시달렸으므로 처우 개선과 복직을 요구하는 대구 대한방직 쟁의가 일어났다. 이에 관한 파업과 소송은 1960년 4.19 이후에나 해결되었으므로 축구단을 꾸려나갈 형편은 아니었던 셈.
  12. 최정민 씨와 박일갑 씨는 52년까지는 조방 소속이었으나, 이후 CIC에 몸담았다.
  13. 1951년대회는 조선방직팀과 조선방직 대구공장(대구방직)팀이 별도로 출전했으므로 이 해 우승팀은 조선방직이 아니라 조방대구으로 표기
  14. 특무대에 잡혀간 손기정外 -신동아, 2002년 1월 31일 (320호)-
  15. 진기록 진경기 (12) "패배는 곧 죽음" -경향신문, 1976년 2월 27일-
^ 한국경영사학회 회보 <經營史學> 통권 43호 -1950년대 귀속 면방직공장의 노동분쟁에 관한 비교연구(서문석)- pdf 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