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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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식 (1971년 1월 6일 ~ )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이자 축구인으로, 1989년부터 2002년까지 K리그에서 활약하였던 공격형 미드필더이다.



선수 프로필

  • 이름 : 최문식
  • 출생일 : 1971년 1월 6일
  • 신체 : 174cm / 80kg
  • 특이 사항
K리그 최초 고교 졸업 출신 드래프트 지명자
  • 수상 경력
1988년 제21회 대통령금배 고교축구대회 득점상 및 MVP 수상
  • 국가대표 경력
1993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대표
1994년 FIFA 미국 월드컵 본선 대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1996년 AFC 아시안컵 예선 대표
1997년 1998년 FIFA 프랑스 월드컵 1차예선 대표
1997년 97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대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통산 A매치 38경기 출전 9득점)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 K리그 기록
연도 소속팀 리그 출장 교체 득점 도움 경고 퇴장
1989 포항제철 아톰즈 포항제철 아톰즈 K리그 17 13 6 1 0 0
1990 20 19 2 2 1 0
1991 18 15 1 1 0 0
1992 31 21 6 2 3 0
1993 13 4 5 1 0 0
1994 19 9 6 6 1 0
1995 포항 아톰즈 포항 아톰즈 6 4 1 0 1 0
1998 포항 스틸러스 포항 스틸러스 36 26 6 2 1 0
1999 전남 드래곤즈 전남 드래곤즈 33 11 7 3 0 0
2000 32 14 4 5 1 0
2001 Teamlogo sbfc.png 수원 삼성 블루윙즈 12 9 0 1 0 0
2002 부천 SK 부천 SK 27 12 3 1 0 0
통산 K리그 264 157 47 25 8 0
K리그 통산 기록은 리그컵 기록 포함. 2016년 12월 1일 기준
연맹 공식 DB


지도자 프로필

주요 지도자 경력

연도 소속팀 직책
2003 ~ 2004 대한민국 경수유소년클럽 고등부 코치
2004 ~ 2005 대한민국 삼일공업고등학교 코치
2006 감독
2007 ~ 2008 Teamlogo psfc.png 포항 스틸러스 U-15 (포철중학교) 코치
2009 ~ 2010 Teamlogo psfc.png 포항 스틸러스 2군 코치
2011 전남 드래곤즈 전남 드래곤즈 수석 코치
2012 대한민국 대한민국 U-17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2 ~ 2013 대한민국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 코치
2013 ~ 2015 대한민국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 코치 및 감독 대행
2015.5 ~ 2016 대전 시티즌 대전 시티즌 감독
2017 ~ 현재 중국 옌볜 푸더 수석 코치

감독 기록

소속팀 연도 리그 리그 순위 컵대회 FA컵 ACL
대전 시티즌 대전 시티즌 2015 K클 3 5 18 12위 감독 대행직 수행
2016 K챌 15 10 15 7위 미개최 자격없음
통산 K리그 클래식 3 5 18 K리그 클래식 강등 1회
챌린지 15 10 15

승/무/패는 리그(K클+K챌)에서 거둔 것만, 리그 외 대회는 최종 성적만 기록한다.

선수 생활

유소년 생활

동대부속고에서 "효창 마라도나"로 불린 선수로, 동대부고의 창단 첫 대통령금배 고교축구대회 우승을 이끈 바 있다. 이 대회에서 최 선수는 7득점을 올리는 맹활약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대회 MVP까지 수상하게 되었다. 고교 시절 최고의 활약을 통해 청소년 대표팀에도 소집되며 주가를 올렸고, 명문대학교들의 스카웃 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출신교가 동국대학교의 후원을 받는 부속 고등학교인 이유로 동국대 진학이 확정적이었다.


최초 고졸 신인의 등장

그러나 최문식 선수는 파격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프로 무대인 K리그에 도전장을 내민 것. 이는 당시 포항제철 축구단의 감독직을 역임하던 이회택 감독이 고교 축구에서 수준 높은 활약을 선보이는 최 선수를 관찰하고 이에 매료되어 적극적인 러브콜로 성사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 고졸 신인들이 프로 무대로 바로 뛰어드는 사례가 없었기에 우려 또한 만만치 않았지만, 이에 게의치 않고 K리그 드래프트 1989에 지명해 포항제철 축구단에 입단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이로 인하여 언론과 축구팬들에게 이목이 집중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입성한 첫 시즌에 이회택 감독의 총애는 있었지만, 당시 최고의 플레이 메이커로 통하던 이흥실 선수의 백업 선수로 만족하는데 그쳤다. 그럼에도 자신의 기술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며 첫 시즌에 조커로 활동하며 8월 만 17세의 나이로 데뷔골을 성공시키고[1] 이후 5득점을 올리는 활약으로 그해 신인왕 후보에도 거론되었으며, 탐탁치 않아했던 초반 여론을 뒤집어 놓고 성공으로 마쳐 고졸 신인 시대를 초안을 그리게 되었다.[2]


포철ㆍ포항에서 활약

첫 시즌부터 신인왕 후보에 오른 최문식 선수는 프로 2년차를 맞이한 1990년에는 체력적인 약점과 약간의 2년차 징크스로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며 대부분 경기에 후반 교체 투입되었고, 이듬해 1991년에도 사정은 비슷하여 18경기 출전에 그쳤다. 이 시기에 여전히 건재한 이흥실 선수의 후보 선수로 뛰며 윙어로 출전하거나 조금 더 공격 지역으로 올라가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출전하며 여러 포지션을 경험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이후 포철이 세대교체를 시작하면서 점차 이흥실 선수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아 1992년 본격적으로 주전 선수로 도약해 그해 입단한 유고 특급 스트라이커 라데와 함께 공격 지역에서 군더더기 없는 골 결정력과 경기의 흐름을 주도하는 플레이로 선보이게 되었다.[3] 이 활약으로 박태하홍명보와 함께 1992년 신진 포철의 주축으로 포철의 우승 멤버로 이름을 올렸다. 이후 1993년 허정무 신임 감독 지휘 아래에서 적응기를 마치고 득점포를 가동하던 라데의 공격을 돕고 베테랑 미드필더 유동관 선수와 함께 중원을 지키며 활동했다. 이 시기에 성인 대표팀 김호 감독의 부름을 받고 대표팀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았기에 소속팀에서는 13경기에 출전했으나, 5득점 1도움을 올리는 활약으로 팬들의 신임은 여전히 두터웠다. 그러나 1995년에는 부상 등의 문제로 단 6경기 출전에 그치고 말았다.


전남에서 은사와 재회

1995년 시즌 종료와 함께 상무 축구단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8년 원소속팀 포항 스틸러스로 복귀하여 정규 주전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포항의 대표적인 공격진인 라데가 1996년 맹활약을 끝으로 일본으로 떠났고, 황선홍은 3경기 출전 후 마찬가지로 일본으로 떠나버렸기에 군 복무를 막 마치고 돌아온 최 선수가 군 입대 전만큼 활약할까 하는 의문의 시선이 있었으나, 특급 신인 이동국 선수와 백승철 선수와 좋은 호흡을 보이고 1989년 동년에 데뷔한 수비수 안익수, 적토마 고정운 선수들과 좋은 호흡을 보이며 36경기에 나서 6득점 2도움을 올리며 화려한 복귀 무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최 선수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나서게 되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프로 데뷔와 마찬가지로 이회택 감독이 결정적인 역할이었으며, 포항 관계자들과 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감독의 제의를 승낙해 전남 드래곤즈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전남에서 최 선수는 10번을 달고 게임을 풀어가고 훌륭한 결정력으로 공격 전반에서 우수한 모습을 선보이게 되었다. 포항에서와의 차이점이라면 이전보다 풀타임 경기가 많아지고 경험이 부족하거나 기량 저하가 많았던 전남 공격진에 엔진과 같은 역할을 2000년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침을 겪은 프로 말년

2000년까지 전남 에이스로 활약한 최 선수는 해외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다.[4] 이에 전남 구단 역시 두 시즌 동안 경기력이 들쑬날쑥한 전남에서 군소리 없이 좋은 활약을 선보였던 최문식 선수의 공로를 인정해 여의치 않으면 이적료 없이 풀어주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로 일본 J리그 디비전2 소속의 오이타 트리니다에 입단하는 데 성공하였다.[5][6] 그러나 오이타에 둥지를 튼지 얼마 되지 않아 그를 입단시킨 감독이 사임하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고, 입단 반년여 만인 2001년 6월에 방출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이에 대표팀 발탁과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직을 역임하면서 매번 이적 시장에서 최 선수에게 구애를 펼쳤던 김호 감독이 최 선수를 수원에 입단시키게 된다. 이 시기에 수원은 고종수 선수와 김진우 선수 등 주전 미드필더진이 모두 부상으로 신음하던 터라 검증된 최 선수의 영입을 시기 적절했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경기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12경기에 나서서 별다른 활약 없이 수원을 퇴단하게 되고 말았다. 이후에 2002년에는 부천 SK에 입단하였으며, 27경기에 출전하며 주전급으로 활동하기는 했지만 경기력 자체는 예전만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그해 시즌 종료와 함께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다.


국가대표 생활

90년대 프로 축구 선수들 중 기술 만큼은 최문식 선수를 따라올 자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기에 엘리트 코스를 모두 밟을 것이라는 예상은 있었으나, 중요 대회에서 본선 대표로 뽑히지 못하는 징크스를 갖고 말았다. 이는 본선 직전 엔트리에서 낙마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대표적이고 김호 감독의 총애로 본선 무대를 밟을 것이 확정적이라는 소문이 있던 1994년 FIFA 미국 월드컵도 대표적이다. 미국 월드컵에서는 그해 최 선수와 같은 소속의 포항제철 축구단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한 신예 조진호 선수에게 밀려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말았다. 이후에는 차범근 감독의 부름을 받고 1998년 FIFA 프랑스 월드컵 1차예선 대표 주전 미드필더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이후에 다른 미드필더 선수들에게 밀려 더이상 선출되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불운의 연속이었으며, 최 선수의 플레이상 단점과 이를 대체하는 자원들 또한 쟁쟁하였기에 중요 경기에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플레이 스타일

테크니션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선수이다. 90년대 중반에는 노정윤, 윤정환 선수와 함께 국내 최고 테크니션 반열에 올랐는데, 윤정환 선수가 경기 템포와 패싱 능력에서 창의성이 돋보인다면 노정윤 선수는 저돌적이고 수비 가담까지 좋은 테크니션으로 불렸다고 한다. 여기에 최 선수는 안정적인 드리블 능력을 바탕으로 전진하면서 짧은 순간 내주는 패스가 일품이었으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포와 같은 고급 테크닉을 실전에서 활용할 정도였다. 게다가 골 결정력은 위에 언급된 선수들보다 가장 좋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다만, 선수 생활 내내 따라다녔던 단점은 체력이 약하다는 것과 수비 커버 플레이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는 1994년 노정윤 선수 대신 최 선수를 중용하던 김호 감독이 언론으로부터 비판받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정도.[7][8] 최문식 선수의 테크니션 계보는 전대에 김병수이흥실 선수가 있었으며, 후대에 고종수이관우 선수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지도자 생활

코치 시절

부천에서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같은 해인 2002년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신홍기 씨와 함께 경수 유소년클럽삼일공업고등학교 축구부에서 활동하였다. 2006년에는 신홍기 씨가 감독직을 내려놓고 전북 현대 모터스 코치로 부임하자 감독으로 부임해 한 해 동안 활동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는 친정팀 포항 스틸러스의 15세 이하 유소년팀에서 활동하였으며, 박창현 코치와 함께 세르지우 파리아스 감독을 보좌하는 2군 코치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또다른 친정팀인 전남 드래곤즈의 수석 코치로 부임하여 활동했으며, 한 시즌이 지난 뒤 2012년부터 2015년 여름까지 청소년 대표팀과 올림픽 대표팀 소속 지도자로 활동했다.


대전 시티즌 시절

그러던 중, 2015년 5월에 K리그 클래식으로 승격시킨 뒤, 클래식 무대에서 극심한 부진을 겪고 조진호 감독이 경질되어 공석이 된 대전 시티즌 감독에 취임하여 K리그 지도자로 첫 선을 보이게 되었다.[9] 최문식 감독은 여름 이적 시장에서 의욕을 보이면서 여러 선수를 보내고 보강하면서 바쁘게 보내기도 했으나, 이미 조직력이 붕괴된 대전에서 별다른 지도 역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말았다. 전반적으로 추구하는 축구 스타일은 알겠지만, 현실성이 떨어진 전술이었다는 것이 주된 비판. 이듬해 2016년에도 활발한 영입을 보이기도 했지만, 평가는 비슷했기에 시즌 초반 잦은 역전패와 연패로 대전팬들이 등을 돌리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자신만의 색이 선수들에게 입혀지면서 연승 행진을 이어가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지만, 가을부터 뒷심 부족과 소극적인 전술로 승격이 좌절되었다. 이 이유로 시즌 종료와 함께 대전 감독직을 사임하고 말았다.[10] 전반적으로 대전 감독을 역임하면서 초보 감독이 보여주는 시행착오를 보여줬다는 비판과 자신만의 축구 철학이 확실해 차후 색깔있는 지도자로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구체적으로 시행착오가 많아 조직력이 완성되지 않았고, 수비 전술이 많이 부족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황인범 선수를 제외하면 창의성이 떨어지는 미드필더진과 패스 정확도가 매우 떨어지는 장클로드와 같은 수비 지역 선수들을 두고 패스 축구 철학을 고집한 것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전술 운영이라는 비판을 받았는데, 그해 득점왕인 김동찬 선수의 분전이 없었더라면 성적이 더 낮았을 것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다시 코치로

중국 슈퍼리그옌볜 푸더의 사령탑인 박태하 씨의 사단에 합류하여 다시 코치로 활동할 예정이다.[11]


지도자 스타일

선수 시절 대표적인 플레이 메이커로 패싱 축구의 정점에 있었지만 피지컬과 수비를 중시하는 지도자 스타일을 보여주는 윤정환 감독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감독으로 최문식 씨는 선수 시절 자신의 플레이를 지도자로 그대로 활용하려 하는 모습으로 대전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에도 "대전셀로나"를 완성시키겠다는 포부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경기장에서도 그대로 녹아들어 선수들이 공간을 적극적으로 만들거나 과감한 스루패스를 자주 시도하는 변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식 감독으로 경험이 적기에 스타일만 있지 내실은 부족한 모습이다.


에피소드

경력

시즌 소속팀 리그 비고
1989 ~ 1998 포항 스틸러스 포항 스틸러스 K리그
→ 1996 ~ 1997 상무 축구단 상무 축구단 실업 군복무
1999 ~ 2000 전남 드래곤즈 전남 드래곤즈 K리그
2000.12 ~ 2001.06 일본 오이타 트리니타 J리그 디비전2
2001.07 ~ 2001.12 Teamlogo sbfc.png 수원 삼성 블루윙즈 K리그
2002.01 ~ 2002.12 부천 SK 부천 SK K리그
선수 생활 은퇴


같이 보기

참고

  1. 만 17세 10개월로 1989년 당시에 최초 기록이며 이는 1993년 아르헨티나 신성 루벤 선수가 만 17세 9개월의 나이로 경신하였다.
  2. 1989년 신인왕은 일화 천마고정운 선수에게 돌아갔다. 당시 고 선수는 31경기에 출전하며 4득점 8도움을 올려 K리그 베테랑 선수급 활약을 보였기에 신인왕 수상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한다.
  3. 라데의 첫 시즌은 3득점으로 현재 유명세에 비해 아쉬운 모습이었으나, 경기력 자체는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일종의 적응기였던 셈.
  4. 이는 이영중 씨의 주선으로 당시 오이타에서 유소년 감독을 역임하던 황보관 파견해 기량을 관찰한 끝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5. 오이타가 자금 사정이 안좋았었는지 결국에는 이적료 없이 이적하는 데 합의하였다고 하며 최 선수에게 연봉 4000만 엔을 주는 조건만 있었다고 한다.
  6. "최문식 오라" 일본서 러브콜
  7. 당시에는 기술적인 면만 화려한 선수보다 투쟁적으로 뛰는 선수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에 노정윤 선수는 활동량과 기술 모두 지니고 있기에 언론으로부터 대세설을 얻었다.
  8. 여담으로, 노정윤 선수가 마냥 언론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는 않았다. 드래프트 거부 파동과 반일 감정이 극심했던 시기에 J리그 진출로 대놓고 비판받는 역사도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 J리그에서 월드 스타들과 밀리지 않는 모습으로 자리잡았기에 여론이 누그러진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노정윤 문서 참조.
  9. 대전시티즌, 제9대 사령탑 최문식 감독 취임식 개최
  10. 대전시티즌 최문식 감독·대표이사 자진 사퇴
  11. 옌볜 박태하사단 합류하는 최문식, "중국무대 경험이 발전의 기회 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