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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구''' (1944년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 선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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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구''' (1944년 ~ 2006년 )은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 선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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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업 선수가 되기 이전까지 ==
 
== 실업 선수가 되기 이전까지 ==

2022년 12월 3일 (토) 21:22 판

최승구 (1944년 ~ 2006년 )은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 선수이다.

조원철, 이강조 등과 더불어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라 기록으로 남긴다.

실업 선수가 되기 이전까지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3살 때 어머니와 함께 월남하여 강원도 옥계에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이후 옥계국민학교, 옥계중학교를 거쳐 강릉상고에 진학하였는데 당시만 해도 강릉상고 축구부가 창단되기 이전이라 최씨는 강릉상고 럭비부에 몸담으면서 주산을 익히는등 일반 상고 학생으로 재학을 거의 끝마쳐가고 있었다. 그런데 고3 시절 강릉상고에 축구부가 창단되었고, 축구부 코치는 최씨에게 축구부 입단을 제의한다. 이에 럭비를 그만두고 축구 선수로 갈아탄 최씨는 강릉상고 축구부 에이스로 발돋움,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 선발전에 발탁되기에 이르는데.. 최종 선발을 코앞에 두고 군입대 영장이 날아온다. 사연인즉슨, 당시 최씨는 강릉상고에서 축구를 더 배우기 위해 유급을 택한 상황이었는데 당시 병역법상 만 20세에 달한 성인 남성이 대학에 가지 않은 상황이면 무조건 군대에 가야했던 것.[1] 결국 청소년대표 선발전 출전을 고사한 최씨는 그길로 군에 입대하였고, 전방에서 군복무를 수행하다 월남에 파병되는 십자성 부대의 일원으로 베트남까지 가게 된다. 이후 월남에서 1년 7개월간 체제하면서 군복무를 마치게 되는데.. 그 때까지도 축구 선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선수 시절

이미 군복무 도중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테스트를 보게 해달라'며 강준영 당시 양지 축구단 코치에게 편지를 보낸 적 있었던 최씨는, 1970년 3월 제대 후 재차 강준영 코치를 찾아갔다. 당시 강씨는 한일은행 축구단 창단 코치에 부임하여 선수단을 구성 중이었기 때문. 이에 테스트를 해본 강씨는 '정신 상태가 좋다' 며 최씨의 한일은행 입단을 허락한다. 정식 축구 교육을 1년여 받은게 전부이고, 여기에 상당 기간을 군복무 그것도 해외 파병으로 보내며 훈련을 받지 못한 몸상태였음에도 실업 축구 선수가 되는데 성공했던 것. 이후 최씨는 1970년대 중반까지 한일은행 소속으로 활동하다 은퇴하였고, 이후 평사원으로 한일은행에서 활동하며 지점장 자리까지 올랐다고 한다.


에피소드

  • 월남 파병 기간 중에도 축구는 꾸준히 했다고 한다. 특히 베트남 현지 주민들과 위화감 해소를 위해 더러 경기를 벌이고는 했는데.. 한번은 자신을 일전에 습격했던 베트콩이 현지 주민인 것처럼 주변을 속이고 축구 경기를 벌이는 것을 보고 붙잡아, '축구하다가 베트콩 잡은 용사'로 소개되기도 하였다고..


같이 보기


참조 문헌

  • 월간축구 1972년 6월호


참고

  1. 이와 비슷한 이유로 이강조 선수도 고3 시절 군입대 영장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이강조 씨는 최승구 씨의 강릉상고 10년 후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