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로마 올림픽

파일:1960 로마 올림픽.jpg
로마 올림픽 엠블럼

1960년 로마 올림픽이란, 1960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개최된 올림픽을 말한다.

축구 위키인 풋케위키에서 1960년 로마 올림픽이란, 올림픽 축구 종목에 한정하여 다룬다.


진행 과정과 결과편집

총 52개국이 지역 예선을 거쳤으며 본선에는 16개국이 참가하였다. 16개 국가는 A,B,C,D 4개조로 나뉘었으며 각조 1위가 4강에 진출하였다.

최종 결과는 아래 표와 같다.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유고연방 축구 국가대표팀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득점왕 : 하랄트 닐센 (Harald Nielsen) 덴마크 - 8골


한국의 참가편집

대표팀 선발 명단편집

이하 명단은 아시아 동부 지역 예선 2라운드 對 자유중국과의 경기를 앞두고 선발된 대표팀을 가리킨다.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스탭진
감독 김용식 보성전문 작고
코치 민병대
선수단
GK 함흥철 헌병감실 작고
박상훈 해병대 ?
FB 김정석 고려대학교 생존
엄경진 ?
김홍복 헌병감실
김찬기
손명섭 특무대
유광준 병참단
심건택 해병대
김진우
FW 우상권 헌병감실 작고
유판순
문정식 특무대
최정민
차태성
유충석 ?
조성달 해병대
박경화 연세대학교 생존

※ 현 소속팀은 2015년 1월 1일 기준입니다.


예선 진행편집

남북단일팀 해프닝편집

1959년 초, FIFAIOC의 권고에 따라 대한축구협회에 황당한 지시를 보내는데 남북한 축구 단일팀으로 올림픽에 출전하라는 지시였다.[1] 당연히 대한축구협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거절 의사를 표시했고, 이에 IOC와 FIFA도 수긍하면서 단일팀 구상은 해프닝으로 끝났다.[2]


아시아 동부지역 예선 1라운드편집

로마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은 아시아 동부 지역과 중동 지역으로 나누어 치러졌으며 동부 지역에서는 2팀, 중동 지역에서는 1팀이 본선에 진출하도록 하였다. 동부 지역 예선에는 인도네시아, 호주, 아프가니스탄, 인도, 버마, 자유중국, 일본, 한국 총 8팀이 참가한 바, 홈&어웨이 방식으로 1라운드와 2라운드를 거쳐 최종 2팀의 본선 진출국을 뽑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때 대한민국은 1라운드 상대로 일본이 배정되었으며 1954년 월드컵 아시아 예선과 마찬가지로 홈&어웨이를 치르지 않고 2경기 모두 도쿄에서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1959년 12월 13일, 고라쿠엔 경기장에서 1차전이 개최되었으며 여기서


아시아 동부지역 예선 2라운드편집

한국과 대만 간에 벌어지게 되었는데 경기 방식은 홈&어웨이였으며 1차전은 1960년 4월 25일 치러졌다. 알다시피 이 때 4.19 혁명이 일어남에 따라 대한축구협회는 제대로 된 선수 선발전을 치르지 못한채 1차전을 위해 타이페이로 선수단을 보냈다. 당시 로마 올림픽 아시아예선 대표팀 명단은 아래와 같다.


참가 자격 박탈편집

1차전에서 전반 41분 대만에 1골을 뺏긴 한국은 곧바로 차태성 선수가 중거리 슈팅을 성공시켜 1:1로 동점, 후반에는 최정민 선수가 1골을 추가함으로써 2:1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원래대로라면, 2차전은 5일뒤 4월 30일 서울에서 치루어져야했으나 4.19 혁명 소식으로 대만 선수단이 한국 입국을 거부, 결국 2차전도 타이페이에서 치루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2차전, 전반 22분경 영국인 주심인 존 페트리가 한국 선수의 반칙을 선언하면서 PK를 대만에 허용한다. 당시 대만의 PK는 함흥철 골키퍼가 슬라이딩하며 멋지게 막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심이 킥 어게인을 선언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김찬기 선수가 패널티킥 순간 패널티 에어리어 안에 들어와 있었다는게 그 이유였다. 한국 선수단은 PK를 차는 순간에 김찬기 선수는 패널티 에어리어에서 6M 가량 떨어져있었음을 항의하였으나 주심은 단호했다. 그러자 분을 참지못한 한국 선수들이 주심에게 달려들었고, 관중들도 소요 사태를 일으키려는등 분위기가 흉흉해졌는데.. 주심은 곧바로 경기 중단을 선언한 후 퇴장하면서 2차전은 전반 25분여만에 중단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대한축구협회는 1차전의 승리만으로 한국이 올림픽에 출전해야 함을 주장했으나, FIFA측은 대만이 제출한 증거 (한국 선수가 주심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찍은 사진 및 주심의 의견서)에 타당성을 인정하여 한국의 올림픽 출전권을 박탈하고 대만의 올림픽 참가를 결정한다.

한국 선수단 입장에서는 억울했겠지만 규정상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필드 내에서 주심의 결정은 절대적인 것이기에, 주심의 결정에 분을 참지못하고 달려든 것은 명백한 잘못이었기 때문. 이는 당시 한국 내 축구 경기 중 심판이나 경기감독관을 선수 내지 감독, 아니면 제3자(...)가 폭행하는 일이 자주 있었던 것을 볼때 심판 알기를 우습게 알았던 당시 한국 축구 풍토에 일침을 놓는 사건으로 평가함이 더 타당할듯 싶다. 물론 이 때 참가자격 박탈당하고 50년이 지난 지금도 심판알길 우습게 아는 풍토는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결과 요약편집

참가 자격 박탈로 본선 진출 실패


같이 보기편집


참고 사항편집

  1. 실제로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서독과 동독이 단일팀을 구성해 올림픽 축구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이를 IOC가 꽤 좋게본 모양인지 아예 1960년 올림픽은 분단 국가들의 단일팀 구성을 의무화하는 무리수를 저질렀던 것.
  2. 정전된지 6년도 안된 시점에서 IOC의 지시는 너무도 무리수였다. 결국 남북단일 축구팀은 1990년에 가서야 현실화 된다. 자세한건 남북단일팀 문서를 참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