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단축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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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2.141.9 (토론)님의 2017년 12월 9일 (토) 17:0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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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단축구협의회(金融團蹴球協義會)는 금융단 소속 축구팀들의 협의체이자 각종 금융단 축구 대회를 주관하는 단체였다.


개요

1969년 4월 25일 설립되어, 금융단 축구 리그 등 각종 금융단 축구 대회를 주관하다가 1970년 금융단축구협의회 소속 축구팀이 한국실업축구연맹에 통합되면서 매년 대통령배 금융단축구대회국무총리배 금융단축구대회를 개최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1976년 2월 28일 해체되었다.


역사

1960년대 후반, 이전까지 아시아 최강을 자부하던 한국 축구는 충격적인 사실에 직면하고 있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월드컵 8강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고, 1968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일본이 동메달을 획득하고, 가마모토 쿠니시게가 올림픽 득점왕을 차지하는등 국제 무대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는 반면, 한국 축구는 아시아 예선조차 통과하지 못했기에 그로 인한 자존심 상처가 엄청났던 것.[1] 이에 북한과 일본의 축구 발전에 대항해 한국 축구를 발전시킬 방안으로 3가지가 시행되었는데, 하나는 중앙정보부장 김현욱의 양지축구단을 창단이었고 나머지는 대한축구협회 재무이사 시절 장덕진이 설립한 금융단축구협의회와 회장 재임중 시행된박스컵 국제축구대회였다.

그 중 금융단 축구팀의 창단으로 설립된 금융단축구협의회는 1970년대 축구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는 변변한 실업 축구팀이 없어 축구인들이 운동으로 먹고 살려면 군인이 되는 길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던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선수들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여야 축구 발전과 전력 강화가 가능하다는건 모두가 공감하는바였지만, 돈먹는 하마 취급을 받을게 뻔한 실업팀의 창단을 바라기는 언감생심이었는데.. 이때 구세주로 등장한 것이 축협 재무이사인 장덕진 씨였다. 68년 멕시코 월드컵 이후 그는 재무부 이재국장[2]이자 대통령 박정희의 처조카 사위라는 막강한 파워를 이용하여 금융단 소속 12개 국책은행과 시중은행들에게 축구단 창단을 요청하였다. 당시 이재국장이 얼마나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냐면 은행, 보험, 증권, 금고 등 1500여개 모든 금융기관의 인사와 경영에 관한 주요 결정의 책임자이자 금융기관의 대출 한도와 대출 금리를 정하며, 대기업에 대한 여신관리도 책임지는 자리였다. 때문에 은행장들은 이재국장이 호출하면 언제든지 즉각 달려와야 했으며, 은행장들도 이재국장을 한번이라도 만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상황이었을 정도.. 한마디로 은행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자리가 이재국장 자리였다. 이런 사람의 요청이니 은행 축구팀의 설립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전초전으로 1968년 10월 제1회 금융인체육대회[3]를 개최하였으며, 이듬해 1월 상업은행 축구단의 창단을 시작으로 3월 주택은행, 조흥은행, 제일은행, 외환은행, 산업은행, 신탁은행의 창단과 함께 금융단축구협의회를 결성하고 실업축구와는 독자적인 금융단 축구리그를 시행하게 되었다.


회원사



주관 대회

금융단축구협의회는 1969년 3월 설립후 한국실업축구연맹에 가입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아래의 대회들을 운영하다 1970년 8월, 금융단축구협의회 내 12개 팀이 모두 한국실업축구연맹에 가입하면서 독자적인 대회를 폐지하고 한국실업축구연맹 주관 대회에 참가하였다. 다만 아래에 기술된 대회들 중 국무총리배 금융단 축구대회는 1976년까지 존속하였고, 대통령배 금융단 축구대회는 잠시 중단되었다가 한국실업축구연맹 주관 하에 명맥을 유지했다.

아래는 1969년 3월에서 1970년 8월까지 금융단축구협의회에서 주관한 대회 및 금융단축구팀이 참가한 대회 목록이다.





평가

금융단축구협의회의 등장은, 이전까지 제일모직, 대한중석, 한국전력, 철도청 이상 4개 팀으로 근근히 버텼던 한국 축구계에 12개나 되는 팀을 만들어준 일대의 사건이었으며 이는 한국축구 중흥으로 이어지는 토대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1983년 수퍼리그가 창설 됨에 따라 은행팀들은 관심에서 멀어져 하나둘씩 해체되었고 IMF 위기때 그나마 남아있던 팀들도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으며,[11] 금융단축구대회 및 리그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해서 1981년 잠정 중단되었다가 1986년 부활해 몇차례 더 개최된 뒤 최종적으로 폐지되며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요컨대 금융단축구협의회는 한국프로축구 출범 이전까지 한국축구의 생명줄이 되어주었으며, 한국프로축구 출범과 함께 바톤을 넘겨주며 '연결자'로서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볼 것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인지, 2002년 월드컵 이후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 선정 작업에 있어서도 수퍼리그 설립 등의 업적이 있는 최순영 전 대한축구협회 회장보다 금융단축구협의회 구성을 이끌어낸 장덕진 전 회장이 선정 대상으로 적합하다는 의견이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같이 보기


참고

  1. 여담으로 1966년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한국은 66년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는, 68년 올림픽에 아마추어 규정에 따라 참가할 수 없다는 FIFA의 유권 해석에 반발해 기권하였고 (참고 기사 : [1]) 이처럼 월드컵 불참까지 불사해가며 참가한 1968년 올림픽은 일본에 밀려 아시아예선에서 탈락했다.
  2. 2014년 현재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의 지위.
  3. 일은 상은 공동우승 -1968년 10월 22일, 동아일보-
  4. 3월 22일부터 동월 28일까지 개최된 금융단축구협의회 주관 최초의 대회이다. 한국일보사의 주최로 효창운동장에서 거행된 본 대회는, 총 7개 팀이 참가하여 예선후 4강 토너먼트를 통해 우승팀을 가리었다. 초대 우승은 조흥은행이 준우승은 산업은행이 차지하며 마무리 되었다.
  5. 1ㆍ2차에 걸쳐 서울운동장에서 진행되었다.
  6. 8월 21일 서울운동장에서 실업 선발팀과의 일전으로 치뤄졌으며 금융단 선발팀이 3:2로 승리하였다.
  7. 1월 6일부터 2월 4일까지 진행되었으며, 총 9경기를 치뤄 6승 3무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당시 6승은 싱가포르 군경팀, 말레이시아 셀랑고 FA, 페낭 FA, 푸테라, 태국은행연합팀, 일본 청소년대표를 상대로 거두었고, 3무는 인도네시아 메단, 태국 청소년대표, 후루카와전공을 상대로 기록하였다.
  8. 2월 21일부터 동월 28일까지, 장소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실시되었으며 8개팀이 2개조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결과는 산업은행ㆍ서울은행 공동 우승으로 마무리.
  9. 3월 19일부터 26일까지 효창운동장에서 총 8개팀이 AㆍB 2개조로 나누어 상위 1,2위 팀이 4강 토너먼트에 진출해 우승팀을 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우승은 주택은행이 차지하였고, 준우승은 조흥은행, 3위는 산업은행, 4위는 제일은행이 차지하였다.
  10. 4월 17일부터 5월 20일까지 효창운동장, 인천공설운동장, 금성방직구장, 건국대운동장 등에서 진행되었으며 총 10개팀 참가하였다. 본래 69년 리그와 마찬가지로 1차부터 5차까지 리그가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금융단축구협의회가 한국실업축구연맹과 통합됨에 따라 1차 리그 결과만으로 시상하고, 대회를 마무리지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11. 국민은행도 이 때 해체했다가 몇년 뒤 재창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