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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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주장으로 출전한 박창선

박창선 (1954년 2월 2일 ~ 현재)는 대한민국미드필더 출신 감독이다.


프로필[편집]

선수 프로필[편집]

  • 성명 : 박창선
  • 등록명 : 박창선
  • 출생일 : 1954년 2월 2일
  • 신체조건 : 170cm / 65kg
  • 국가대표 기록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예선 대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예선 대표
1980년 아시안컵 예선.본선 대표
1984년 아시안컵 예선.본선 대표
1986년 FIFA 멕시코 월드컵 본선 대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1975년 ~ 1986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통산 A매치 32경기 출장 8골)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 K리그 기록
소속 연도 출장 교체 득점 도움 경고 퇴장
할렐루야 축구단 할렐루야 축구단 1983 15 1 3 6 3 0
대우 로얄즈 대우 로얄즈 1984 28 0 6 7 0 0
1985 5 0 0 2 1 0
1986 12 4 0 1 0 0
유공 코끼리 유공 코끼리 1987 13 3 2 1 0 0
통산 (K리그) - 73 8 11 17 4 0
K리그 기록은 리그컵 포함. 2014년 12월 1일 기준.

지도자 프로필[편집]

  • 지도자 경력
연도 경력
1992 동아고등학교 감독
1993 ~ 2003 경희대학교 감독
1998 대한민국 U-19 청소년대표 감독
1999 대한민국 유니버시아드 대표팀 감독
2010 ~ 박창선 축구클럽 감독



선수 시절[편집]

유소년 생활[편집]

경상남도 김해 출신으로 동아고등학교[1]경희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성인 무대[편집]

1977년, 당시 실업축구단이었던 포항제철 축구단에 입단하며 성인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983년에는 최초의 프로팀 할렐루야 축구단으로 이적하여 활동하였다. 수퍼리그 원년에 도움상을 수상했고, 할렐루야의 우승에 기여하였으며, 다음해 84 축구대제전 수퍼리그에서는 대우 로얄즈로 이적하여 대우의 우승을 이끌고 시즌 MVP로 뽑히는 최고의 활약을 보였던바 있다. 1986년까지 대우 로얄즈에서 활약한 뒤, 1987년에 유공 코끼리로 이적하여 1시즌을 더 소화한 뒤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플레이메이커 스타일에 특화된 선수로, 자유롭게 공격 진영에서 포지션을 스위칭하며 날카로운 킥을 선보였던바 있다. 여기에 자기관리도 뛰어났던 선수로, 대우 로얄즈에 입단한 첫 해인 1984시즌 이미 한국 나이로 32세로 여느 축구선수 같으면 이미 은퇴했을 나이에[2] 시즌 전 경기 (28경기)를 풀타임 소화하며 6골 7도움을 기록하였으며, 이어 1984년 가을 부터는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1984년 AFC 아시안컵 예선과 본선 무대를 별 문제없이 소화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로도 3년간 프로 무대에서 더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1986년 월드컵에서는 본선 무대 골까지 기록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지도자 시절[편집]

1992년 모교인 동아고등학교 감독을 맡았고 이듬해에는 모교 경희대학교의 사령탑에 오르며 경희대학교의 전성기를 이끈다.[3] 1998년엔 19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을 이끌고 태국에서 있었던 U-19 아시아 청소년 축구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다. 이 당시 김은중, 이동국을 중심으로 한 3-5-2 전술을 구사해, 아시아 대회에서 4승 2무[4] 경기당 평균 득점 2.0을 상회하는 가공할만한 공격력을 선보이며 축구팬들에게 호평을 듣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 입시비리 의혹[5] 으로 청소년대표팀 감독직을 자진 사퇴하게 되면서 1999년 U-20 세계청소년 축구선수권 대회조영증 감독이 이끌게 된다.[6]

대한민국 유니버시아드 감독직을 끝으로, 경희대학교 축구부 감독직에 매진하던 박창선 감독은, 2003년 경희대학교의 지휘봉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떠난 뒤에 수년만에 귀국 후 고향인 경남 김해에 박창선 축구클럽이라는 유소년 클럽을 창단해 운영 중에 있다.


에피소드[편집]

  • 선수 시절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도 우승 기록이 참 많은 축구인이다. 1983년과 1984년 각기 다른 소속으로 수퍼리그를 연속 우승했고, 아시안클럽챔피언십아시안게임의 우승도 경험한바 있다. 이후 지도자로도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와 각급 대학축구대회에 많은 우승 경험을 가지고 있다.
  • 대한민국의 사상 첫 월드컵 본선 득점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조별예선 1차전 對 아르헨티나 전에서 후반 28분 팀의 추격골을 기록한바 있다. 골을 기록한 뒤 두 손을 들고 포효하며 무릎을 꿇는 세레머니 영상이 아직도 회자될 정도. 하지만 박창선 골이 터지기 이전에 이미 3골을 내리 실점했던 터라 경기는 그대로 1:3 패배로 종료되고 말았다.[7] 그러나 이 골 덕분에, 박창선 선수는 월드컵 올스타로도 선정된 적이 있다. [8]


업적 및 수상[편집]

국가대표팀[편집]


클럽[편집]


개인[편집]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각주[편집]

  1. 럭비 선수로 부산 배정고에서 활약하다 축구선수로 전향하기로 하면서 동아고로 전학을 하게된다.[K리그 레전드] 박창선, 월드컵 1호골에 빛나는 최고의 MF ⑨[1]
  2. 당시에는 30세만 되면 선수 생활 은퇴를 종용받는게 상례였다.
  3. 재임 기간동안 대학선수권, 대학연맹전, 전국체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4. 1경기는 PK승이라 무승부로 분류
  5. 결국 무혐의로 결론이 났고, 박창선 감독은 곧바로 유니버시아드 감독을 맡게되며 99 유니버시아드에서 8강의 성적을 기록한다.
  6. 여담으로 박창선이 정착시켜 놓았던 3-5-2 전술은 조영증 감독에 의해 4-4-2로 재편되는데.. 하지만 전술 부적응과 정보 부족 등으로. 이어진 FIFA U-20 월드컵에서 한국은 조별예선 탈락을 당하고 말았다. 반면 아시아대회에서 한국 U-20 대표팀이 2:1로 이긴 적이 있었던 일본 U-20 대표팀은 FIFA U-20 월드컵에서 사상 최초로 준우승을 차지하며 한국 축구팬들의 자존심을 구긴바 있다. 여담으로 한국 청소년 대표가 FIFA U-20 월드컵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인 말리 전을 앞두고 있던 하루 전날, 박창선 감독이 이끄는 한국대학선발팀이 유럽 전지 훈련을 다녀온 일본 대학선발을 이겼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청소년대표팀 감독 교체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만큼 99년 FIFA U-20 월드컵의 쇼크가 대단했던 셈. (감독 교체를 탓할수는 없지만...동아일보 1999년 4월15일 [2])
  7. 그래서 월드컵때마다 4년에 한번씩 언론에 회자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8. [김덕기의 프로축구 30년<31>] ‘월드컵 첫 골’ 박창선 월드컵 올스타 선정] ‘월드컵 첫 골’ 박창선 월드컵 올스타 선정][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