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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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하

박태하(朴泰夏, Park, Tae Ha, 1968년 5월 29일~)는 대한민국 출신의 축구선수로 1991년부터 2001년까지 K리그에서 활동한 공격수이다.



프로필[편집]

  • 이름 : 박태하
  • 국적 : 대한민국 대한민국
  • 출생일 : 1968년 5월 29일
  • 신체 : 177cm / 72kg
  • 국가대표 경력
1994년 FIFA 미국 월드컵 아시아예선 대표
1996년 AFC 아시안컵 아시아예선 대표
1998년 FIFA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예선 대표
1994년 ~ 2000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통산 A매치 11경기 출장 7골)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 K리그 기록
소속팀 연도 출장 교체 득점 도움 경고 퇴장
포항제철 아톰즈 포항제철 아톰즈 1991 31 6 3 0 4 0
1992 35 11 5 7 4 0
1993 5 4 0 0 0 0
포항 아톰즈 포항 아톰즈 1996 36 7 9 4 3 0
포항 스틸러스 포항 스틸러스 1997 18 0 6 4 1 0
1998 38 9 9 10 3 0
포항 스틸러스 포항 스틸러스 1999 31 4 5 4 3 0
2000 35 4 8 2 2 0
2001 32 14 1 6 5 0
통산 (K리그) - 261 59 46 37 25 0
K리그 통산 기록은 리그컵 기록 포함. 2001시즌 종료 시점 기준.
연맹 공식 DB


지도자 프로필[편집]

연도 소속팀 직책
2005년 ~ 2007년 포항 스틸러스 코치
2007년 ~ 2011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 수석 코치
2012년 FC GS 수석 코치
2015년 ~ 현재 연변 FC 감독


유소년 생활[편집]

경북 영덕 출신으로 강구중학교와 경주상고, 대구대학교를 나왔다. 강구중 2학년 시절 부상을 당해 2년 가량을 쉰 탓에 경주상업고등학교 시절까지는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창단 2년차였던 신생 대학 축구부 대구대학교에 입학한 것을 계기로 대형 스트라이커 재목으로 급성장했다. 당시 대구대에는 조정현 등 걸출한 MF 자원이 많았기 때문에 박태하 선수의 득점력이 빛을 발했고,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등 굵직굵직한 대회에서 골을 기록하며 프로팀 스카우터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1]


프로 생활[편집]

당시 포항은 이회택 감독의 지휘 아래, 최문식, 권형정, 이영상, 박창현 등 젊은 선수들을 발굴해내며 젊고 강한 팀으로 발돋움하는 중이었다. 이러한 이회택 감독의 눈에, 새벽부터 나와 자율훈련을 펼치고 밤 10시 이전에 취침에 들어가는 성실함으로 무장한 박태하 선수는 주전감으로 낙점되었고 이에 박선수는 유수의 포항 선수들을 제치고 데뷔시즌부터 주전으로 발탁되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92시즌 포항을 우승으로 이끈 뒤 94년 월드컵 대표에도 발탁된 박선수는, 이후 상무에 입대해 군인 신분으로 국가대표 경기를 뛰며 경기감각을 유지했다. 95년 군복무를 마친 박선수는, 96시즌 포항에 복귀해 라데+황선홍이라는 K리그 역대 최강 투톱을 받쳐주는 역할을 수행하며, 포항 공격진의 한축을 맡아 활약하였다.


지도자 생활[편집]

2005년부터 친정팀인 포항 스틸러스의 코치로 부임해 세르지오 파리야스 감독을 보좌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2007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로 부임하며, 대표팀과의 인연을 이어갔으며, 2010 FIFA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예선 당시에는 조광래 감독을 보좌하는 수석코치 자리에 부임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조광래 감독이 레바논 쇼크 등을 견디지 못하고 사임하자, 박태하 수석코치도 동반 사임하였으며 이후 2012년 FC GS 수석코치로 부임해 1년간 활동하다 퇴단하였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에피소드[편집]

  • 박태하 선수는 1990년대 초반에 프로 생활을 시작했는데, 당대는 '프로축구 인기 = 국가대표 인기' 였고, K리그 이외에 여타 대회 (아시안클럽챔피언십 이라던가..)에 대한 관심이 바닥을 치던 시기 중 하나였다. 때문에 박태하 선수와 포항이 전성기를 구가했던 1990년대 중반에는 성적도 잘나오고 아시안클럽컵 2연패까지 일구어냈음에도 대중의 관심을 받지못했다. 나중에 박태하 선수가 은퇴할 시점 즈음에 이르러서야 아시아대회에 대한 관심이 부쩍 증가하자, 박선수는 지금 필드에 뛰면 더 행복했을 것이라는 의미의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덕분인지, 박태하 선수의 팀에 대한 충성심 + 팬에 대한 충성심은 타의 모범이 될정도로 확고하며, 최근 축구선수들이 자신들의 인기를 당연시하는 세태나 거만해지는 세태에 대해 누구보다 안타까워하는 사람 중 한명이기도 하다.
  • 프로 데뷔 초기부터 17번만을 달고 뛰었다. 1998년 포항이 신세기통신의 후원을 받을때 박태하가 17번이었기 때문에 파워디지털 017의 광고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 국가대표에도 11경기에 나서 7골을 넣는등 A매치에서도 탁월한 기량을 과시하였으나, 유독 큰 대회를 앞두고 부상을 당해 국가대표와는 좋은 인연을 맺지못했다. 특히 1994년 미국 월드컵19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 부상으로 낙마한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듯.
  • 1999년 7월 팀성적이 부진하던 포항을 이끌던 박태하는 포항의 주장으로서 책임을 지고 삭발을 단행했던바 있다. 박태하 선수가 삭발을 감행한 후 팀은 7경기 무패 (5승 2무)를 기록하며 상승세를 탔고, 삭발 효과(?)를 목격한 각 팀 주장들이 너도나도 삭발을 해 삭발 전성시대(??)를 열기도 했다.


경력[편집]

  • 1994 ~ 1995 : 상무 불사조 / 실업축구 (군복무)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참고[편집]

  1. 사실 박태하 선수는 프로팀에 입단할 생각이 없었다고. 본래 할렐루야나 주택은행 등 실업팀 입단을 생각했으나, 대구대학교와 자주 연습경기를 가지던 포항제철 아톰즈의 눈에 들어 포항 입단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